“자식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 조용필 지금까지 어떻게 숨기고 살았을까 그리고 모두가 소식이 공개되자 안타까워했습니다.
조용필은
대한민국 대중음악 역사상 최고의 싱어송라이터이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죠.
지금은 고인이 된 마왕 신해철이 공손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명이며 이승철이나 이은미조차도 조용필 앞에서는 고개를 못 든다고 합니다.
물론 조용필이 군기반장이라는 소리는 아니고 존경심에서 하는 소리인데요.
그런데 조용필은 자신의 인생이 실패했다고 말하며 자식에 대한 안타까움을 전했는데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개그맨 이성미 씨가 실수로 폭로한 말에서 그가 지금까지 숨겨온 안타까운 사연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한국 가요사의 불멸의 업적을 쌓은 조용필이지만 사실 조용필 인생에서 미스터리가 여러 가지 있는데, 세상 사람들은 이것을 잘 이해하지 못하죠.
조용필의 인생을
알기 위해선 어린 시절과 더불어 다양한 후유증까지 함께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조용필은 자신의 첫 번째 결혼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하는데요.
1984년 3월 결혼식 때 자신은 그게 결혼식인 줄도 모르고 결혼식장에 갔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용필의 첫 번째 결혼식은 경기도 남양주의 봉선사에서 거행된 비밀 결혼식이었죠.
기자들 몇 명 보는 앞에서 신부가 면사포도 쓰지 않고 후다닥 치른 결혼식이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의아했습니다.
당시 조용필의 아내 박지숙의 아버지는 전 신민당 3선 국회의원 박찬이었습니다.
정계 실력자이자 경제계 및 교육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이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조용필이 세력들의 강압에 의하여 박지숙과 결혼했다” 혹은 “조용필이 다양한 파동을 겪고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일부러 권력자의 딸과 결혼했다”등의 루머가 횡행하기도 했는데요.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죠.
조용필은 키가 작고 수줍음을 잘 타 어릴 적부터 여자들의 눈길을 별로 끌지 못했고, 스무 살이 넘도록 사랑의 아픔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사랑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고 합니다.
조용필은 1976년 ‘조용필과 그림자’를 결성해 밤무대를 누비던 시절의 그녀를 만났는데, 당시 그녀는 단발머리 여대생이었고 자신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져들었다고 하죠.
하지만 ‘딴따라’와의 연애에 발끈한 박지숙 집안사람들의 끈질긴 반대와 다양한 수도 없는 파동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암울했던 시절 조용필의 유일한 안식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조용필은 오랜 무명 시절의 인기를 얻게 되자, 그녀의 존재를 잊어버리곤 했고 대중들의 관심과 노래에 대한 집착이 사랑마저 부담스럽게 느껴졌죠.
결국 조용필은 박지숙과 약혼 4년 만에 몇 차례 결혼식을 번복하다가, 1984년 산사에서 비밀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강 씨의 결혼식인지도 모르고 갔다는 조용필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아 아마 박지숙의 강력한 요청에 의하여 만들어진 결혼식이었던 것 같은데요.
이런 결혼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둘의 신혼 생활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결혼 이튿날 조용필은 신혼여행도 없이 프랑스 문화성에 초청을 받아 혼자 프랑스 파리로 출국하면서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기 시작했고, 이런 이상한 행동들은 그의 첫 번째 결혼 기간 내내 계속되었죠.
신혼 초부터 시작된 해외 공연과 잇따른 방송 출연 레코딩 작업으로 조용필은 바깥으로 나돌았고, 잇따른 연예인들과의 스캔들로 박지숙은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지는데요.
게다가 그녀를 가장 힘들게 만든 것은 조용필이었습니다.
집에 돌아오면 별말 없이 밥 한 술 뜨고 연습실에 처박혀 밤을 새우곤 했는데, 이런 행동들이 그녀를 미치도록 외롭게 만들었죠.
그러다 결혼 생활 중이던 1986년 3월 박지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박지숙은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강변도로에서 극약을 마시고, 승용차에 쓰려져 신음 중인 것을 지나가던 택시 운전사가 발견했고, 병원으로 옮겨 일단 목숨은 건지는데요.
당시 박지숙은 혼수상태에 빠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죠.
그리고 결국 조용필과 박지숙과의 사이에 자식은 없었고, 1988년 이혼하게 됩니다.
그 후 조용필은 “사랑이 곁에 있을 때, 그것을 깨닫고 행복해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절절했는지, 나는 그로부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비겁했다. 인기를 위해 사랑을 버렸고 음악을 위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다”라고 고백했는데요.
첫 번째 부인과
이혼 후, 조용필이 어떻게 “가왕”으로 거듭나는지 그 이유 또한 미스터리합니다.
조용필은 데뷔곡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고 인기를 얻다가 갑작스럽게 좋지 못한 파동에 휘말리면서 은퇴를 하게 되죠.
일각에서는 이를 단순한 ‘쇼’로 치부하는데, 그 실체적인 진실은 전혀 다릅니다.
사실 조용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그를 바라보면 안 됩니다.
당시의 시대상과 더불어 조용필의 성격과 어린 시절 개인사를 완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요.
조용필은 경기 화성에서 염전업을 하던 집안의 7남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사대 독자로 고향 유지였던 할아버지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화성 최고의 부자였죠.
아버지는 큰 형을 데리고 사냥 나가는 것을 좋아하셨는데, 성격이 너무 완고하고 권위적이어서 자신과는 잘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사냥을 나가면 조용필은 따라 나가지 않고 하모니카를 불고 기타를 치며 방 안에서 뒹굴었는데, 그런 조용필을 보며 아버지는 “못난 놈”이라며 혀를 찾죠.
그렇게 조용필은 학창 시절에 ‘비틀스’와 ‘벤처스’에 푹 빠져 살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가출을 감행하게 됩니다.
음악에 대한 아버지의
반대가 워낙 심했기 때문이죠.
조용필은 처음 가출할 당시만 해도 평생 음악을 하리라고는 절대로 생각 못 했고, 자신은 비틀스 세대니까 그냥 하고 싶은 건 해야 했을 뿐이라고 말했는데요.
이후 조용필은 미군 클럽 무대에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게 됩니다.
이 1968년부터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기 전까지 조용필은 철저하게 무명 가수로 살아가게 되죠.
이 당시의 큰 사건으로 밴드의 보컬이 군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기타리스트였던 조용필이 가수로 전향하게 되고, 1975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발표하여 큰 인기를 얻게 되는데 여기에는 숨겨진 사연이 있습니다.
조용필이 1975년 그의 첫 독집 앨범을 내던 당시의 구색 맞추기로 끼워 넣은 노래 한 곡이 대한민국 전역을 휩쓴 기이한 일이 벌어진 것인데요.
바로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는데 당시까지 로커로 자부하고 있던 그는 트로트 한국어로 졸지에 스타가 된 것이었죠.
사실 당시 부산은 재일교포들의 고향 방문단이 대대적으로 입국하던 장소였고, 이런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큰 인기를 끌게 된 것인데요.
하지만 불과 89개월 후에 조용필은 파동에 휩쓸리게 됩니다.
그는 1975년 겨울 전용 무대 한 타임을 끝내고 나오다 사복 간부들에게 끌려갑니다.
주전자 고통 역시도 치가 떨리지만 더 가혹했던 것은 붙들려가자마자,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벽돌 사이로 밀어 넣고는 무시무시한 각목으로 사정없이 찔러댔던 행위라고 합니다.
조용필은 “거기에는 인간이 없었고, 그렇게 당한 많은 음악인들이 좌절했고, 한대수, 이장희 같은 사람은 아예 이 땅을 떠났다”라고 회상했는데요.
그렇다면 조용필이 정말로 죄를 지은 걸까요.
당시 흔하게
유통되던 그것들은 허점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도 조용필이 그것을 피운 건 파동이 일어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조용필은 좋지 못한 가수라는 공격을 받게 되고, 1977년 자의 반, 타의 반 은퇴하게 됩니다.
조용필은 견딜 수가 없었고, 5월 4일 장충체육관에서 은퇴 쇼를 가진 그날 밤, 밤새 술을 퍼마시면서 울었습니다.
이 정도라면 다양한 정신 후유증으로 스스로 방송 생활을 접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사실 당시 그것의 입법 미비로 명백한 허점이 아니었지만, 박정희 독재 정권은 자유분방한 예술인들을 길들이기 위하여 무자비하게 탄압을 했죠.
그런데 그것의 파동으로 가수의 길이 끊긴 조용필은 어떻게 했을까요?
실의에 빠져서 모든 것을 포기했을까요?
조용필은 전혀 다른 행동을 합니다.
오히려 음악에 더 깊숙이 빠져들었죠.
이때 조용필은 ‘한오백년’을 비롯한 우리 창을 만나게 되고, 판소리를 접목한 그의 창법으로 당시까지 미성이었던 그의 목소리가 탁성으로 바뀌게 되는데요.
위기의 순간에 오히려 한 단계 더 발전하게 된 것이죠.
이후 조용필은 다시 밴드를 조직하여 밤무대 가수로 전전합니다.
방송 출연은 막혔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죠.
조용필은 미친 듯이 음악에 몰두했고, 새벽 4시 반 무대가 끝나면 5시부터 아침밥 먹을 때까지 연습을 했고, 이후에 점심때까지 취침하고 일어나면 무대에 설 때까지 다시 연습을 강행했습니다.
밴드 중에 게으름을 피우는 멤버가 있으면, 주먹질도 불사할 만큼 필사적으로 밴드를 이끌었죠.
확실히 이런 모습을
보면 조용필은 재능을 타고났을 뿐만 아니라, 필사적인 노력에 의하여 그 재능이 만개했다는 평가가 맞는 것 같네요.
이후 조용필은 1979년 좋지 못한연예인에 대한 전면 해금 조치와 더불어 1980년 ‘창밖의 여자’를 히트시키며 다시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조용필은 독신 생활을 하다가 1993년 6월 미국 애틀란타 공연에서 친누나의 소개로 한때 로비스트로 활동했고, 결혼 당시에는 오퍼상을 운영하던 재미동포 사업가 안진현을 만나게 되는데요.
조용필은 안진현 씨와 결혼 결심을 굳히게 된 것은 그녀의 순종적인 태도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오랜 미국 생활에도 전혀 문화적인 이질감은 없었고, 오히려 한국에서만 산 여자들보다 더 가정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하죠.
조용필은 약 8개월간의 열애 끝에 안지현과 1994년 3월 25일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조용필처럼 안진현 역시 재혼이었습니다.
조용필은 아이가 없었는데, 이것은 조용필이 재혼하던 당시 나이가 벌써 45살이었고 아이가 생기지 않았죠.
밤으로 가는 초 방송에 출연한 조용필은 “노래에서는 성공했지만 내 인생은 마이너스나 다름이 없다. 나에게 또 한 번 결혼할 기회가 생긴다면 아이를 가지고 싶다”라고 말했는데요.
“우연히 쇼핑하다가 아기 신발을 보고 너무 예뻐서 사다가 tv 장식장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라는 이야기까지 했습니다.
조용필은 두 번째 결혼에서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결국 사별로 아내를 떠나보내게 됩니다.
원래 안진현은
약 3년 정도 심장 관련 질환을 앓아왔고, 2002년에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병원에서 두 번째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 결국 이 심장 질환이 악화되어서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된 것이죠.
조용필은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부부지간이었지만, 남들이 질투할 만큼 서로가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모든 일을 서로 상의했고, 나는 모든 것을 와이프에게 맡겼습니다.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결혼 상대자라는 것을 서로 느꼈을 만큼 운명적인 만남이었어요. 아내는 나와 너무 잘 맞았어요. 내겐 아내 이상의 존재였고요”라며 먼저 떠난 아내를 그리워했습니다.
2022년 11월 조용필은 4년 만에 콘서트로 돌아왔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열리는 조용필 단독 콘서트인 만큼 공연은 일찌감치 전석 매진되었죠.
또한 9년 만의 신곡도 선보인다고 하는데요.
아직까지도 끊임없이 변화 혁신을 추구하는 더 나은 차원으로 가려는 뮤지션으로서의 순수한 갈망이 엿보입니다.
그의 삶이 곧 음악이고, 음악이 곧 조용필의 삶 그 자체라 할 수 있는데요.
그냥 한마디로 조용필은 한평생 음악에 미쳐 있는 음악 중독자고 음악을 진정성 있게 대하는 뮤지션이었죠.
내년 말에 20집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고 하는데 조용필 씨의 활발한 활동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