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안녕히 계십시오…” 79세 배우 박인환의 갑작스러운 속보에 모두가 오열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또 어딨을까..” 79세 박인환 갑작스러운 소식에 모두가 오열하고 말았습니다.

박인환은

1945년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내성적이고, 숫기가 없는 성격이었는데요.

어릴 때만 해도 시골에서 과수원이나 농장을 해보고 싶다며 꿈을 꾸던 박인환은 고3 때 한 신문에서 ‘앞으로는 신문방송학과나 연극영화과가 전망이 좋다’라는 기사를 보고는 사춘기 시절 함께 영화 보며 몰려다니던 친구들 다섯 명과 함께 연극영화과에 지원하게 됩니다.

내성적이던 박인환이 연극영화과에 지원한다고 하자 어머니는 “네가 무슨 거길 가냐, 남 흉내를 잘 내느냐, 노래를 잘하느냐, 거긴 아무나 가는 데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이후 합격자가 발표되었는데, 친구들은 다 떨어졌지만 약 1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박인환 혼자 합격 하게 됩니다.

그렇게 대학에 입학한 박인환은 당시 동기로 ‘윤문식’과 ‘최주봉’을 만나게 되는데요.

 

 

박인환은 연기를

배우려고 대학에 들어갔지만, 막상 가보니 대학은 연기를 가르치는 학원이 아니었습니다.

실기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대학에서는 세계 연극사나 동양 연극사 등 이론 수업만 가득했고, 몇 페이지 읽어 나가기도 힘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억지로 읽었어야 했는데요.

결국 기대와는 달랐던 학교 수업에, 함께 하던 연극영화과 동기들은 2, 3학년이 되자 포기를 하던가, 의무를 가는 등의 사유로 학생 수가 반으로 줄게 됩니다.

박인환의 동기인 윤문식은 후에 ‘동기들 중에 가장 연기 안 할 것 같은 자기와 최주봉 그리고 박인환 이 세 사람이 결국에는 끝까지 연기자로 남았다’라고 밝혔는데요.

연극 무대에 서려면 학교 선배들이 함께 작품을 하자고 불러줘야 할 수 있었지만, 당시 윤문식은 서산 시골에서 올라와서 고무신을 신고 다녔고, 사투리까지 하니 연극에 캐스팅이 잘 안되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인환은 윤문식에 비해 운이 좋았고, 선배들한테 불려 다니고 힘들게 무대 연기를 갈고닦게 됩니다.

대학 재학 도중 그는 중간에 휴학을 하고 의무를 하게 되는데, 그러한 가운데 중 그만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 듣게 됩니다.

바로 박인환을 낳아주고 길러주신 그의 아버지가 위암으로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인데요.

아버지를 여인 후, 결국 의무를 그만 두고 한 박인환은 자식 중 장남이었고, 막내는 고작 6살에 불과해서 이제부터는 아버지를 대신해 자기가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과 맞닥뜨리게 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상대를 졸업해서 은행에 취직을 하는 것이 최고였던 시절이라, 박인환도 역시 복학을 하기 전 경영학과에 편입 원서를 내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그가 활동했던 극단에서 연락이 오는데 바로 ‘3개월간 지방 순회공연을 도는데 같이 하지 않겠냐’라는 제안이었습니다.

당시 시간이 있던 박인환은 돈도 많이 준다고 하길래 윤문식과 함께 전국 순회공연에 들어가게 되는데요.

공연이라 해봤자 대단한 극장에서 하는 공연이 아니라 일종의 마당극 형식으로, 시골 국민학교 운동장이나 공설운동장 또는 냇가에서도 북 치고 탈 쓰고 장구 치며 하는 공연이었습니다.

동기 윤문식 이후에 마당놀이 스타가 된 것이 바로 그때가 출발이었던 것인데요.

그렇게 3개월간의 일정을 마치자 박인환은 목돈을 받게 되었고, 어머니께 ‘연극을 해서도 경제적으로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라고 말하며 경영학과 편입이 아닌 연극영화과로 복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후 오랫동안 돈을 만져보지 못하며 가난한 연극쟁이의 삶을 살게 되는데요.

같은 과에 잘생기고 제주 많은 친구들이 중간에 많이 포기를 할 만큼 연극배우는 힘들고, 어렵고 고생만 하면서 돈도 못 버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는 이후

결혼을 하며 가정도 꾸렸지만, 이후에도 가난한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는데요.

결국 결혼 후에도 약 10년간 고생스럽게 연극을 하다가 80년대쯤부터 tv로 활동 무대를 옮기게 됩니다.

결혼 후 내내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박인환은 우연한 기회에 드라마 쪽으로 연결이 되어 tv 탤런트로 데뷔하게 되는데요.

지금은 명배우가 된 박인환이지만 사실 그는 처음 tv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만 해도 너무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고도 싶었다고 합니다.

그가 원래 하던 연극은 공연을 한 번 하게 되면 한 달, 두 달 연속으로 하기 때문에 익숙해진 상태에서 무대에 올라가지만, tv는 한 번 리허설하고 바로 촬영에 들어가든지 또는 어쩔 때는 당일 아침에 대본 한 번 다 같이 읽고 바로 들어가기도 해서 연극만 하던 박인환에게는 상당히 낯선 환경이었는데요.

 

 

게다가 리허설 현장에는 스태프들이 세트를 세우느라 망치질하는 소리에 조명과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로 요란했고, 연극 때는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무대에 올랐지만 드라마 현장에는 소품팀 등 현장 스태프들의 거친 말들이 여기저기서 나왔기 때문에 박인환은 어떻게 리허설을 했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주 정신없는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전에 리허설을 한 번 하고 오후에 본 촬영에 들어가는데, 그렇게 정신이 하나도 없었던 그는 대사를 못 외워서 NG를 내는 게 아니라 현장에 적응을 못해서 자꾸 NG를 내게 됩니다.

그렇게 살벌한 드라마 현장에서 한동안 적응을 못했던 박인환은 집에 가서 결국 아내에게 ‘자신은 tv 드라마를 못 할 것 같다’라고 실토하게 됩니다.

 

그런 남편의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박인환에게 ‘다른 탤런트들도 그 과정을 다 거치지 않았겠느냐’, ‘당신은 당신 편한 연극만 하려고 하느냐’라고 물었고, 그 말을 들은 박인환은 듣고 보니 일리가 있어서 그렇게 한참 동안 힘든 과정을 견디며 TV에서 버티게 되는데요.

드라마 속 박인환의 모습을 보면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지만, 사실 그는 과묵한 성격을 타고났고 상당히 내성적이라 말 주변도 없어서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싫어한다고 합니다.

유명 연예인들은 학교 다닐 때 다들 예능 부장이나 응원단장을 도맡아 했을 것 같지만, 실제로 배우들 중에는 내성적인 사람도 많고 그런 사람이 반대로 연기파도 많다고 하는데요.

그나마 드라마는 대본이 있으니까 거기에 몰입을 해서 하면 되지만, 예능 프로인 경우 박인환은 재미있게 해달라고 요청이 와도 본인이 재미가 없기 때문에 거의 출연을 꺼려왔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능 프로에 출연하는 그를 볼 수가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박인환도 한 번에 큰 도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드라마 ‘나빌레라’에서 발레를 배우는 노인의 역할을 연기하며 팔순을 앞둔 나이에 발레복까지 입으며 열연을 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흔여섯 나이에 굳은 몸으로 무려 6개월이나 발레 강습을 받으며 드라마의 주연으로 맹활약을 했는데요.

사실 나이가 많아지면서 대사를 외우는 것도 힘든 나이가 되었지만, 그는 끝없이 대사를 외우고 춤 연습을 하며 열심히 반복한 끝에 결국 드라마를 성공리에 마칩니다.

박인환은 노년이 되며 기억력이 떨어졌지만, 상대방과 자신의 대사를 마치 시험 공부하듯이 계속 집중해서 반복적으로 읽고, 화장실에 가서도 끊임없이 되새기면서 긴 대사를 외운다는데요.

심지어는 녹화 전날과 녹화 날은 긴장되고 집중해야 해서 아무도 안 만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 관계에서 오해를 많이 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박인환에게 ‘그거 몇십 년을 했는데 대사 몇 마디 외우는 게 뭐가 어렵냐’라고 하지만, 익일 녹화를 맞는 그는 산만해질까 봐, 외출도 안 하고 심지어는 전화도 못 받는다고 합니다.

그렇게 연습에 연습을 반복해서 몸에 배게 해야 안 놓치고 겨우 따라갈 수 있다고 말하는 박인환.

과연 명배우답게 그는 사실 연기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일이 잘하는 사람일수록 더 많이 연습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평생을 노력한 결과 젊은 시절 가난에서 벗어나며 세 자녀를 잘 키워냈을 뿐만 아니라, 평생을 옆에서 고생해 준 아내에게는 작은 건물도 선물해 줄 수 있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성실하게 활동하던 박인환에게 그만 어느 날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닥치게 됩니다.

바로 70여 년간 그를 지켜주신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신 것인데요.

서울 중앙대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린 박인환은 연극 ‘그대를 사랑합니다’에도 출연 중이었지만, 어머니를 보낸 슬픔 속에서도 연극 공연은 꿋꿋이 이어가는 프로의 진면목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과거 동료였던 김인문과 김은기가 별세했을 때도 빈소에 조문했고, 또한 배우 하지원의 동생인 배우 전태수가 30대의 나이에 극단적 선택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에도 공개 석상에서 그를 언급하며 안타까워했던 박인환이었기에 어머니의 별세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텐데요.

 

박인환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도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것이 있냐는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항상 준비하라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는 못할 것 같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는 80대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아직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와닿지도 않는다며 몸이 한창때보다 못하고 기억력도 감퇴했지만, 대사는 노력하려면 외워지고 움직이는 데도 지장이 없다고 밝혔는데요.

아직도 자신은 배울 것도 많고, 할 일도 많다고 밝히는 박인환은 연기자가 안 됐다면 뭐가 됐겠느냐는 질문에 “연기는 자신의 운명이자 팔자라서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다”라고 밝혔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우리 시청자들은 그의 드라마를 보며 때론 웃고, 때론 눈물을 흘리며 감동을 받기도 했었던 것인데요.

시골에서 올라와 대학을 다니며 연기를 배우다가 군 복무 중 아버지를 여의더니, 가난한 연극쟁이에서 벗어나고자 tv로 활동 무대를 옮겼지만 힘들게 적응하며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야 했고, 그렇게 힘든 시간 끝에 결국 자리를 잡았지만 연기자가 된 후에도 도전을 멈추지 않았던 박인환.

평생을 함께해 주신 어머니가 끝내 세상을 떠난 슬픔 속에서도 꿋꿋이 스케줄을 소화했던 박인환의 파란만장했던 인생.

그가 앞으로도 오래도록 우리 곁에서 건강히 활동하기를 바라며, 힘든 인생을 살아온 배우 박인환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