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생 배우 전원주의 눈물겨운 소식..” 그렇게 아끼고 살더니만… 장례식장에 아무도 오지 않은 그녀의 사연을 알아보세요..

여러분은 만약 사랑하는 배우자가 나 아닌 다른 사람과 사랑을 한다면, 과연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본 적 있으신가요?

40여 년 전 전원주는

한 친구의 전화를 받는 순간 온몸에 힘이 빠지고 다리가 후들거리게 되는데, ‘다른 남자들은 다 바람을 피워도 내 남편만은 그런 일이 없을 것’라며 철석같이 믿었던 남편이 호텔에서 다른 여자와 나오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는 친구의 전화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친구의 전화를 끊은 후 남편에게 ‘야 이놈아. 난 살려고 이렇게 애를 쓰는데 너는 그 짓을 하느냐.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냐’라며 욕이라는 욕은 다 하고 싶었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른 채 우선 마음을 가다듬고 편지를 쓰게 됩니다.

 

결국 이때 평소와는 다르게 어둡게 가라앉은 남편의 얼굴을 보니 ‘아 정말 그런 일이 있었구나’싶었고, 예전에 친구들이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속내를 털어놓을 때면 ‘그걸 그냥 놔두느냐. 나 같으면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을 거야’라며 입에 거품을 물었던 본인인데, 막상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자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잠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시간을 거슬러 1939년 북한 개성에서 태어난 전원주는 인삼 농사를 크게 했던 부모님 덕에 어려서부터 유복하게 자랐으나, 11살이 되던 해 6.25가 일어나면서 보따리 하나 들고 남한으로 피난을 온 뒤에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게 됩니다.

 

 

그렇게 고향을

잃고 남한으로 온 후부터는 못 먹는 건 다반사고, 장녀인 그녀가 동생들을 챙기며 하루에 일곱 번씩 물지게를 하고 나르면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하다 보니, 결국 이때부터 키가 자라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그래도 그녀의 어머니가 억척스럽기로 소문난 개성 사람이라 당시 남한에서 정착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고 장사를 해 크게 성공하면서, 그 어려운 시절 남자도 아닌 여자인 전원주가 숙명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지원으로 대학을 나온 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최고의 신붓감이었던 선생이 되었고, 그러나 그녀의 고백으로는 어릴 때부터 유독 인물이 없던 자신에게 직업이라도 좋은 걸로 만들어주려고 교사로 진로를 정해주셨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의 바람대로 교사가 되어 어느 중학교의 담임을 맡았지만, 좀처럼 적성에 맞지 않아 교사에 대한 회의감이 들게 되는데, 대표적인 예로 작은 키 때문에 칠판에 글씨 쓰기도 힘들고, 심지어 가르치는 학생들이 그녀보다 키가 더 커 선생님으로서 혼낼 때도 얼굴을 들고 혼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은 훈육 주임 선생님이 여학생들을 나란히 세워놓고 차례로 체벌하게 되는데, 끝에 서 있던 작은 키에 전원주까지 학생인 줄 알고 체벌했다가 워낙 세게 맞아 기절하게 되었고,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교사를 그만두고 어릴 적부터 꿈이었던 연예인이 되기로 마음먹게 됩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대학까지 보내서 선생 만들었던 딸이 당시 천대받던 딴따라를 하겠다고 하자, 그녀에게 전신 거울을 보여주며 “네 낯짝을 봐라. 네가 무슨 연예인 얼굴이냐. 자기 자신을 알아야지. 그래서 내가 너 선생 만들어준 건데. 팔자가 대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느냐”리며 극심한 반대를 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꿈이 더 간절했던 그녀는 결국 배우의 길을 도전했고, 그런데 당시 방송계에서는 전원주가 너무 못생겼다며 받아주지를 않자, 할 수 없이 동아방송 1기 성우로 먼저 데뷔하게 됩니다.

하지만 주인공만 하던 성우 때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돌아오는 역할은 분장도 필요 없는 가사 도우미 역할 뿐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당시 감독들 사이에서 ‘식순이는 전원주다’라는 말까지 돌 정도였고, 심지어 그냥 가정부만 하는 게 아니라 밥상 들고 애까지 거머줘야 하는데 재수 좋은 날은 가벼운 애가 오고, 그렇지 않은 날은 무거운 애가 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맨날 식모 역할만 도맡아 하자 어느 날은 안면 있는 감독에게 사모님이나 마님들이 입는 비단 치마를 입고 연기하는 것이 꿈이라며 하소연을 했고, 그런데 얼마 뒤 그 감독으로부터 비단 치마를 입는 배역이라며 출연 제안이 와서 신나게 출연하러 갔더니 신들린 무당 배역이었다고 했습니다.

 

 

한편

이 무렵 28살의 나이로 그녀는 어머니로부터 한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이 남자는 인물이 좋고 서울대를 나왔고 더불어 아버님은 치과 의사로 집안까지 상당히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첫 번째 남편은 굉장히 가부장적이자 무서워도 너무 무서워서 말대꾸도 못했고, 당시 부부 싸움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무섭던 남편이 어느 날 기침을 심하게 하더니 결혼 3년 만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뭣도 모른 채 혼자가 되어버린 그녀는 설상가상 임신한 상태였고, 그리고 이런 상황 속에서 그녀의 어머니는 당장 아이를 지우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그냥 낳기로 하고 ,너무나도 이른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때 그녀의 어머니는 본인 때문에 딸이 인과응보가 되었다고 생각해 딸의 일생을 책임지기로 마음먹고 당시 그녀에게 만약 재혼하지 않고 아들 하나만 믿고 열심히 살면 남편 이상으로 모든 걸 밀어주겠다리며 재혼을 하기보다는 평생 과부로 수절하며 살기를 바라게 됩니다.

이후 두 사람은 5천 원짜리 새 단칸방에서 겨울에 난방도 못 하고 살며 연탄 뜰 돈도 없어 길에서 타다 마른 연탄을 주워다 대며 살아야 했고, 그러다 어느 날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딸의 이러한 비참한 모습을 보고 바닥을 치며 대성통곡하게 됩니다.

설상가상 당시 남편은 가정은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밖으로만 나돌다가 나중에는 사업한다 치고, 친가와 처가의 전 재산을 탕진하는 난봉꾼이 되었고, 거기다가 바람까지 피우며 파주에서 아이까지 낳아 기르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배우로서도 아내로서도 사랑받지 못한 그녀는 그래도 노력하고 기다리면 해 뜰 날이 올 거라고 믿고, 무려 30년의 세월을 참고 또 참아야 했고, 그러다 어느 날 끝없는 무명의 세월을 보내던 그녀에게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웃음 연습을 하고 난 뒤에는 자신의 호감을 사기 위해 방송국에서 우습지도 않은데 감독들 앞에서 이런 캐릭터에 맞는 역할이 있으면 섭외해 달라는 의미로 맨날 깔깔깔 웃어대기 시작했고,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작전이 성공해 국민 드라마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의 하성 댁으로 캐스팅되게 됩니다.

 

결국

그녀의 호탕한 웃음소리는 큰 반향을 일으키며 이후 7년 8개월이나 이 드라마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 후에도 그녀의 인기는 상승세를 이어가면서 IMF가 와서 남들은 다 힘들다고 할 때 오히려 그녀는 더 잘 나가게 됩니다.

가슴 아픈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돌파구를 차지해 국민배우로 인기를 얻은 배우 전원주 씨.

그녀의 호탕한 웃음소리 앞으로도 계속 들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