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세 이경애 세 번의 결혼 끝에 결국 안타까운 소식이…” 얼마나 힘들면 유체이탈 경험까지… 최근 공개된 그녀의 눈물겨운 상황..

여러분은 혹시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약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웃음으로 오죽하면 신이 내린 최고의 명약을 웃음이라고 하는데요.

심지어 슈바이처는 우리 몸에는 완벽한 약국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웃음이라고 했으며 그래서 잘 웃는 사람이 가장 건강한 사람이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웃음을 사람들에게 선사하는 직업이 있으니, 다들 아시다시피 바로 개그맨, 개그우먼들로 오늘의 주인공 역시 귀한 웃음을 전하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개그우먼입니다.

1984년 데뷔와 동시에 코미디의 전성기를 이끌며 큰 화제 한 인기를 얻었던 개그우먼 이경애는 스무 살의 나이로 방송에 데뷔해 매해 대상까지 받으며 말 그대로 승승장구했었습니다.

 

 

그녀가

말만 하면 유행어가 되었고 그녀가 떴다하면 대박이 터졌던 코너들로 수많은 유행어와 대박 코너를 남기며 평범했던 스무 살의 소녀가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녀는 “내가 KBS 개그 경연에서 대상을 받으면서 하루아침에 그냥 스타가 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 우리 집에서 방송국까지 버스를 타고 가는데 벌써 버스가 시끄러워서 못 할 정도로 난리가 났었다. 그리고 이후부터는 방송국 여기저기에서 나를 다 부르더라 코너마다, 라디오마다, 이것저것 다 했는데 그때는 벌이가 정말 괜찮았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세상 모든 일이 그러하듯 그저 열심히 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는지, 그녀는 40년 방송 생활 동안 수많은 방송에서 대중들에게 웃음을 선사했지만, 정작 인간 이경애의 삶은 비극이 아니라 비극 그 자체였습니다.

그녀는 한때 정신을 놓아버린 친어머니가 무려 다섯 번이나 극단적인 시도를 하자 ‘엄마 호강시켜 드릴 테니까. 제발 살아달라’라며 빌어야 했고, 또한 고인이 된 남편마저 간이식을 받고 겨우 살아줘서 고마웠던 찰나 이경애의 카드로 술을 먹고 다른 여자와 잠을 자 버리자, 결국 우울증 때문에 현재는 쓰레기까지 모으며 남들 여럿이 겪을 모진 일들을 혼자서 다 겪어야 했던 이경애.

그녀의 가슴 아픈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난 이경애는 훗날 연예인이 된 이유가 어머니를 호강시켜주기 위해서였는데, 왜냐하면 어린 시절부터 가난 때문에 지독한 현실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뱃사람이었던 아버지는 재산 대부분을 술값으로 써버렸고, 그래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건 어머니였는데 당시 어머니는 자신의 키보다 더 큰 행상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힘겹게 오 남매를 키워주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아버지는 가계비를 지원하지 않았고 어머니가 사업을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며 사업을 금지했다. 어린 이경애는 “도대체 우리 아버지가 왜 이럴까”라며 의아해했다. 우리 형제들이 굶어 천국에 가야 한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당시 나는 아버지에 대해 매우 걱정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도 모르게 장사를 해야 했고, 이 기간 동안 계절에 따라 다양한 사업을 운영하셨다. 마장동에 고기를 사러 가면서 “겨울이 추우니까 고기가 잘 팔린다”고 거기에서 하루 종일 고기를 팔다가 겨울이 지나면 고기를 팔곤 했다. 매실은 봄에 나오므로 우리는 밭에서 매실을 따서 팔았습니다.

또 한 번은 쥐 잡는 날이라 분홍색 쥐약을 주었는데 이번에는 엄마가 쥐약을 마셨습니다. 어린 이경애는 너무 놀라서 길에 서 있는 나무꾼을 붙잡고 “엄마 병원 좀 데려다 주세요”라고 애원했다. 다행히 그녀의 삼촌이 그녀를 병원으로 데려갔고, 위 세척 후에 그녀의 어머니는 간신히 살아 남았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어머니의 간과 위, 신장의 상태가 악화되었고, 이후 어머니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병원에 누워만 지내게 되었고 병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이경애는 이때 깨달았다. 나는 성공해야 한다. 돈이 없으면 이런 일이 발생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 성공해야 해요.”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공부는 안되고, 그때 인생을 설계한 게 ‘그래 연예인이 되자, 연예인은 나이도 공부도 상관없으니까. 이건 마음만 먹으면 될 수 있겠다’ 싶어 그때부터 연예인을 꿈꾸게 되었고, 어쩌면 연예인을 선택했다기보다 당시로써는 연예인 밖에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연예인의 꿈을 꿨으나, 훗날 그녀가 스무 살의 나이로 개그 콘테스트에 나가 대상을 타기 전까지는 정말 사춘기도 없이 혹독한 시간을 보내야 했는데요.

특히 그녀가 중고등학교 때는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을 정도로 돈을 벌어서 학비를 대고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그녀가 고등학교 때 여느 때처럼 돈 되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수세미 파는 아르바이트가 짭짤하다는 얘기를 듣고, 큰 가방에 수세미를 가득 넣어 당시 초등학생 동생의 손을 맞잡고 ‘가자’ 하면서, 아파트에 들어서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두 사람을 향해 ‘야 이리 와’ 하고 부르자, 결국 경비실로 잡혀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때 수세미 하나를 1천 원에 팔면 300원이나 남는 장사라 이경애와 동생은 부푼 꿈을 안고 있었는데, 하지만 아파트에 들어서자마자 경비 아저씨가 하는 말이 ‘너희 이런 데 잡상인 출입 금지인 거 모르느냐. 그리고 만약 잡상인이 오면 그 물건들 다 뺏는 거 알아. 몰라’라며 수세미가 가득 든 가방을 뺏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시 얼마나 울었는지 동생과 이경애의 눈이 퉁퉁 부었고, 아무튼 결국 그걸 돌려받고 집으로 가려는데 그런데 그 순간 오기가 생겨, 그녀가 동생에게 ‘야 우리 지금 네 시간이나 손해 봤어. 여기서부터 집까지 걸어가면서 다 팔고 가자’라며 초등학생인 동생과 남은 수세미를 팔면서 집으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어릴 때부터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집안의 가장이 되어야 했던 그녀는 앞서 얘기한 대로 어떻게든 빨리 연예인이 되어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그러다 1984년 KBS 개그경연에서 대상을 받으며 마침내 정식 데뷔하게 됩니다.

이후 개그우먼으로서 그녀가 말만 하면 유행어가 되고 코너만 했다 하면 대박이 나면서 평범했던 소녀가 하루아침에 말 그대로 스타가 되어 그녀의 삶은 180도 달라집니다.

 

당시

그녀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느냐면 1980년대 후반, 취양락이 당시 단역만 하던 팽현숙을 개그 프로그램 콩트 주역으로 미뤄주려고 할 때 담당 피디가 팽현숙의 연기력이 별로라는 이유로 미덥지 못한 반응을 보이자, 이때 최양락이 ‘김미화랑, 이경애는 처음부터 연기를 잘하는 스타였느냐. 현숙이도 밀어주면 잘할 수 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당시 김미화와 이경애가 최고의 개그우먼이었기에 최양락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었는데, 그만큼 이경애는 80년대 최고의 개그우먼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녀의 나이 27살 때 같은 동네 한 살 오빠를 만나 사랑에 빠져 1990년 결혼을 했으나, 행복도 잠시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성격 차이의 이유로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여자 연예인에게 있어 이혼이란 흔치 않은 일이다보니 대중들의 비난과 심지어 같은 동료까지도 그녀의 이혼을 두고 손가락질을 했었는데, 하지만 이때 유일하게 그녀의 곁을 지켜준 동료가 바로 임하룡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첫 번째 결혼이 허무하게 끝나고, 1997년 카페에서 우연히 두 번째 남편을 만나게 되는데, 당시 두 사람은 각자 한 차례씩 이혼의 아픔을 겪은 상태로 ‘서로 더욱더 이해하고 아껴주자’라는 생각으로 두 사람은 2002년 결혼까지 골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결혼과 동시에 남편의 간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결국 간 경화까지 오게 돼 간이식을 받게 되는데, 그래도 이때 첫 번째 남편의 간이식을 전 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큰아들이 해주면서, 남편은 다행히도 무사히 수술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남편이 살아나자 당시 그녀는 아주 고마운 마음에 내 옆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해도 이해할 정도로 그저 고맙고 다행스러웠고, 그런데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 버리니 한때 그녀는 남편과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이와 관련해 그녀가 직접 고백하길 “남편이 수술로 살아난 뒤 다행이긴 했는데, 이때부터 여자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한 번은 내가 여행을 가면서 신용카드를 다 놓고 왔는데 다녀와서 보니 카드가 없어져서 남편에게 물었더니 남편은 ‘대접해야 해서 선배와 주점에 갔다’라고 하더라”

“그런데 이때 남편이 내게 하는 말이 ‘당신은 아이가 없으면,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떠날 것 같다’라며 갑자기 아이를 갖자고 하는데, 그리고 ‘아이만 낳으면 평생 충성하면서 살겠다’라고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바람과는 달리 당시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이경애가 임신불능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경애는 포기하지 않고 마흔이 넘은 나이에 인공 수정을 결심하고, 마침내 꿈에 그리던 딸 희서를 얻게 되었고, 심지어 이때 남편의 나이는 50대 중반으로 그렇게 귀한 딸을 늦게 얻은 만큼, 앞으로 펼쳐질 두 사람의 인생길에는 그저 행복한 시간으로 가득 채워질 거로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행복도 잠시 당시 이경애는 병원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암 선고를 받게 되는데, 천만다행으로 당시 맹장이 특이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나온 오진으로 맹장염 수술을 무사히 마치게 됩니다.

그렇게 다시 행복한 시간을 보내나 했는데, 그러나 또 이번에는 고속도로 갓길에 차를 세웠다가 뒤에서 오던 차가 졸음운전으로 이경애를 받아버리는 참혹한 사고가 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이 사고는 그녀의 왼쪽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고, 관절이 탈골되는 대형 사고로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고,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통사고가 아니라 남편이었습니다.

당시 아내의 사고가 걱정되어 남편이 며칠 동안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한 결과 원래 좋지 않던 간이 다시 급속도로 나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때 그녀가 교통사고의 재활치료도 끝까지 못하고, 남편의 병간호에 매달리게 되는데, 그렇다 보니 당시 이경애의 몸 오른쪽이 마비까지 오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그녀는 남편과 본인의 병원비를 위해 방송 일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그래서 2005년에는 동료 이경래의 부탁으로 행사를 갔다가, 하필 감전까지 당하면서 이 때문에 공중으로 튀어 오르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본인의 몸도 성하지 않은데 오로지 남편의 건강과 병원비를 위해 일을 해야 했고, 하지만 이런 그녀의 노력에도 딸 희서가 유치원을 졸업할 무렵 남편은 끝내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남편과 사별한 뒤 딸 희서와 살아가던 중, 방송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그녀는 떡볶이 가게를 차리게 되는데, 하지만 이마저도 결국 망해버리자 당시 그녀는 복잡한 마음과 우울한 마음에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건 안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파란만장 했던 인생을 견디며, 급기야 우울증 까지 시달려야 했던 이경애 씨.

다시 한번 건강한 모습으로 TV에서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