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만 해도 미소가 절로 지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리에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밝은 기운을 전염시키는데요.
방송인 장영란이 그런 인물 중 한 명이 아닐까 합니다.
‘장영란’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마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인 듯한 환한 웃음이 떠오릅니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따라 올라가게 되는 신비한 마력이 있는 웃음이죠.
전쟁터 같은 연예계에서 20년 넘게 살아남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장영란은 그런 연예계에서 큰 구설이나 긴 공백기 없이 꾸준히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을 보내는 동안 무수한 고난과 시련이 지나갔습니다.
엄청난 스트레스로 안면 마비를 겪고 모두의 반대를 이겨내고 결혼했지만, 나팔관을 들어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고, 소중한 아이까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밝은 모습
뒤에 감춰진 장영란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장영란의 원래 꿈은 연기자였습니다.
대학에선 연극 영어를 전공했고, 국립극단 연수 단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2001년 우연히 본 엠넷 VJ 공채의 600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하면서 인생이 바뀝니다.
데뷔 후 첫 프로그램이었던 ‘쇼킹 일기’에선, 음악방송 직전 스타들과 짧은 인터뷰를 하는 일을 했는데요.
특유의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발휘하며, vj로서의 입지를 다져가던 그녀는 데뷔 2년 만인 2003년, sbs ‘한밤의 tv 연예’ 리포터로 지상파에도 진출합니다.
이어 2005년 sbs ‘리얼 로망스 연애 편지’는 대중에게 장영란의 이름을 각인시킨 계기였습니다.
연예인들의
짝짓기 프로그램에서 장영란은 남자 출연자들에게 들이대고, 여성 출연자를 질투하는 ‘푼수 캐릭터’를 맡았습니다.
장영란은 본래 내숭 떨지 않는 성격입니다.
그런 면을 처음에 자연스럽게 보여줬더니 반응이 좋아 제작진도 그걸 계속 살리자고 했고, ‘무반응 아가씨’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이는 당시 방송 트렌드를 반영한 전략적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장영란은 그렇게 발견한 ‘비호감’이라는 단어를 자신의 ‘셀링 포인트’로 발전시킵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당당하고 솔직한 모습에, 시청자들의 호응이 커지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장영란은 이런 이미지가 오래갈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습니다.
“tv에 나와도 더 보여드릴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 서른 넘어서 남자 연예인들에게 무작정 들이대는 것도 싫었고요”
2009년 트로트 가수 ‘라니’로 변신한 것은 슬럼프를 극복하고 방송 수명을 늘리기 위한 그만의 생존 전략이었습니다.
‘행사를 뛰려고 가수 데뷔한 것 아니냐’라는 시선이 싫어 이 악물고 노래 연습을 했습니다.
“트로트 가수는 행사 많이 하고 돈을 많이 벌 것 같다는 생각에 ‘돈 좀 당겨볼까’ 했었어요. 노래를 잘 못해도 콧소리만 내면 될 줄 알았어요. 그래서 도전했지만 욕만 바가지로 얻어 먹었어요. 제대로 비호감 이미지가 됐죠”
이러한
장영란의 방송 이미지로 인한 시댁의 결혼 반대도 있었습니다.
장영란 남편의 시가에서는 ‘연상에, 연예인 며느리가 웬 말이냐’라며 엄청 반대를 했습니다.
이에 장영란은 스트레스로 안면 마비 증상까지 겪게 됩니다.
둘의 결혼엔 시댁뿐 아니라 “한의사가 미친 듯이 공부해서 만난 아내가 장영란이냐”라며 네티즌들 역시 불편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식 당일 지독한 딸 바보였던 장영란의 아버지는 상처받았을 딸을 생각하며 크게 슬퍼했다고 합니다.
“결혼 전 시부모님 반대가 심했어요. 제가 당시 방송에서 비호감 캐릭터, 성형 미인, 남자한테 들이대는 캐릭터였기에 시부모님의 입장에서는 한의사 아들을 결코 나에게 보내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또한 장영란은 결혼식 당시를 떠올리며 “신부 입장할 때 저는 빨리 앞으로 가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천천히 가셔서 제가 아버지를 끌었던 기억이 아직도 나요. 결혼 전 시댁에서 결혼을 반대하셔서 더 울음을 참고 힘들어하셨던 것 같아요”라고 털어놨습니다.
‘화목한 가정’의 대표 주자로 떠오르는 장영란은 감사하게도 어릴 때부터 가족들 특히 아빠의 사랑을 많이 받았어요.
“예전에 매니저 없이 방송 다닐 땐 아빠가 차를 닦으시고 매니저 역할도 하셨어요. 자존감이 높을 수밖에 없고, 받은 사랑을 아이들에게 다시 내어줄 수 있는 것에 감사해요. 지금은 돌아가신 우리 아빠, 나중에 하늘에서 만나면 ‘영란아. 열심히 잘 살았다’란 칭찬을 듣고 싶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장영란은 “결혼 전 연애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남자들에게 들이대다가, 0표 받는 컨셉이었을 때 아빠가 그걸 보며 우셨어요. 지금 제가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부모님 마음이 더 와닿더라고요. 그래도 열심히 하는 저를 보며 ‘우리 딸이 최고’라며 응원해 주셨죠”라고 아버지와의 추억을 회상했습니다.
이만큼 딸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던 아버지였기에 딸이 모진 말을 듣는 것도, 사돈댁으로부터 반대를 당하는 것도 마음이 아팠습니다.
장영란은 오랜 췌장암 투병 끝에 돌아가신 아버지 덕분에 가족의 힘을 체감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남편이 자기 병원에 아버지를 모셔서 밥도 안 먹고 아버지를 간호했어요. 시부모님께도 연락하면 시댁에 내려오지 말라고, 아빠랑 시간을 더 많이 보내라고 하셨어요. 그게 잊히지 않아요. 나중에는 시부모님이 아버지 손을 잡고 ‘딸처럼 예뻐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버지도 그래서 편하게 가신 것 같아요”
결혼을 반대했던 시부모들은 뒤늦게 장영란과 장영란의 가족에게 눈물로 사죄했습니다.
그 시절 남편은 장영란과 결혼하기 위해 심하게 반대하는 부모님께 모진 말도, 불효도 했다고 전해졌습니다.
장영란의 배우자 한창은 부모님께 “이 여자랑 결혼해서 살 테니, 날 호적에서 팔아라”라고 했으며, 다음 날 아침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와 버렸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술을 먹다가 비참하고 외로워 어머니께 전화를 했고, “결혼 안 시켜주니까 너무 힘들다. 못 살겠다. 저 그냥 목숨 끊겠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의지에 결국 부모님은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결혼을 승낙했습니다.
하지만 결혼 후에도 시련은 찾아왔습니다.
결혼한 지 1년 만에 아이가 생겼지만, 7주가 됐을 때 배가 너무 아파 병원에 갔더니, 당장 수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자궁 외 임신이었습니다.
남편은
한의사였기 때문에 아내 장영란에 대한 걱정이 더욱 컸습니다.
남편은 “수술을 무조건 해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아내가 수술을 거부했어요. 나팔관 한쪽을 들어내야 했기 때문이에요. 나팔관을 들어내지 않을 경우 출혈로 산모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어요. 나도 무서웠었어요. ‘그게 우리한테 왜 일어났을까?’라는 무서움과 자궁 외 임신이 잘못될 경우에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는 의학적인 지식이 있다는 무서움 때문에 오히려 무서웠어요”라고 심경을 고백했습니다.
첫 아이를 지켜주지 못하고 떠나보낸 미안함에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물을 보인 장영란은 “아침에 병원에 갔다가 오후에 수술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었어요. 하루 종일 울었어요. 신랑도 넋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는데, 남편이 이렇게 무서웠다는 걸 지금 처음 알았어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수술실 들어갔을 때 손 꼭 잡고, 괜찮을 거라고 얘기해 줬을 때 고마웠죠”라고 덧붙이며 변함없는 부부애를 과시했습니다.
그 이후
입양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임신에 대한 기대를 안 했다던 부부는 딸을 얻게 됩니다.
결혼 후 조급함이 사라지고 아이들과 지내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었더니 자연스레 전성기까지 맞게 됩니다.
부부의 사랑은 여전하고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있습니다.
장영란은 데뷔 후 처음으로 프로그램 메인을 꿰차고, 연예인 성공의 상징과도 같은 광고 촬영을 줄줄이 하고 있으며, 장영란의 남편 한창은 개인 병원을 차렸습니다.
돌아보면 장영란의 성장기는 아픈 시간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시련을 이겨내고 전성기를 맞은 장영란의 앞으로의 활약도 많은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