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만… “끝내 사라진 슬픈인연 가수 나미.. 그리고 최근에서야 공개된 그녀의 안타까운 근황과 남편의 실체..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시대를 풍미한 가수 나미.

국민

댄스가수 하면 흔히 김완선을 떠올리지만, 나미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당시 히트했던 노래를 들어도 촌스럽지 않고 세련된 느낌이 든다.

‘인디언 인형처럼’, ‘빙글빙글’, ‘슬픈 운명’, ‘영원한 친구’ 등으로 인기의 정점에 있던 나미는 갑자기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한편, 온라인에는 유부남과 함께 살고 있으며 이미 아이도 있다는 기사가 온라인상에 퍼지고 있다.

이날부터 나미는 눈부신 스타 자리에서 물러나며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과연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16년을 한 남자의 내연녀로 살고, 12년을 아들을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누나로 살아야 했던 나미의 안타까운 사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린 나이에 미 8군 무대를 통해 가수 활동을 시작했던 효녀 가수 나미.

그녀는 댄스 가수의 효시인 60년대 이금희, 70년대 김추자의 계보를 잇는 80년대 최고의 댄스 가수였죠.

곡마다 컨셉을 달리하는 특이한 헤어스타일과 의상, 춤, 그리고 독특한 무대 연출은 자신의 음악을 돋보이게 하려는 피나는 노력의 결과였는데요.

폭넓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그녀는 음악 궤적인 연출력에만 의존하기보다는 무엇보다 가슴으로 파고드는 섹시한 허스키 보이스로 무장했던 가창력 가수였습니다.

여가수로는 최초로 랩과 디스코를 리믹스했던 최대 히트곡 ‘인디언 인형처럼’은 신선했고, 청소년층에는 가히 나미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던 그녀.

그녀는 80년대 최고 슈퍼스타 조용필과 더불어 최고 여성 슈퍼스타였죠.

 

 

본명이 김명옥인 나미는 1957년 10월 1일 경기도 양주군 동두천읍에서 미군을 상대로 레코드점을 경영했던 부친 김종은 씨와 모친 김기례 씨의 1남 4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경영하는 레코드 가게에서 팝송과 더불어 성장했는데, 4살 때부터 하루 종일 틀어대는 최신 유행 팝송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하죠.

음반을 구입하러 온 미군들은 앙증맞게 춤추며 재롱을 부리는 4살짜리 꼬마에게 홀딱 반해버렸고, 이내 동두천 일대에선 ‘똘똘이 춤을 추는 그녀를 모르면 소련에서 보낸 간첩’으로 통했을 정도였는데, 7살 때 미군 장교의 소개를 받은 미8군쇼 프로모터가 찾아옵니다.

반신반의했던 프로모터는 귀여운 꼬마 소녀의 노래와 춤추는 모습에 자신의 눈을 의심해야 했죠.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면 아버지를 따라 시내 곳곳의 극장 무대와 미8군 무대에서 매일같이 노래를 불렀고, 춤 솜씨와 노래 재능으로 단숨에 화제로 떠오른 그녀는 5학년이 되자 당대 최고 인기 가수 이미자 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엘레지의 여왕’의 어린 시절 이미자 역을 맡으며 배우로 데뷔했고, 이듬해에는 미니스커트 열풍을 일으켰던 가수 윤복희 씨 인생을 그린 ‘미니 아가씨’의 꼬마 윤복희로도 출연합니다.

 

 

상도여중에 입학한 후 2학년이 되자 새롭게 결성된 5인조 여성 록그룹 ‘해피 돌즈’의 멤버가 되었는데, 단장 유칠완 씨의 지도로 몇 주간의 연습 후 쇼 오디션에 응시해 AA라는 높은 점수로 미8군 무대에 진출하죠.

당시 미8군 무대에는 또 다른 10대 여성 밴드 ‘서울 패밀리’가 있었는데, 인기 경쟁을 벌였던 두 팀은 사이좋게 월남참전 미군 위문 공연단으로 베트남에 갑니다.

당시 나미는 나이가 어려 월남전이 뭔지도 몰랐지만 잘해서 뽑혔으니 막연히 들뜨기도 했고,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도 있었다고 합니다.

 

주로

사이공에 있었는데, 폭격을 당해 악기들이 망가지고 아수라장이 됐던 일도 있었죠.

결국 사이공이 위험해지면서 나미와 일행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미국과 캐나다의 웬만한 도시들은 모두 누비고 다니면서 공연을 했는데, 클럽의 쇼타임 오프닝 멘트는 항상 발음이 좋은 나미를 세웠죠.

그렇게 1970년대를 월남과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활동한 나미는 곧 한국으로 귀국하지만 이때까지는 자기 노래를 가진 정식 가수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미는 어떻게 유부남 최봉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을까요?

나미는 솔로곡 ‘영원한 친구’를 발표하면서 정식 가수로 데뷔합니다.

원래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계획이었는데, 당시 남동생 병원비를 대느라 집안 경제가 말이 아니었죠.

결국 미8군과의 계약을 포기하고 타워 호텔 라이트클럽에서 일자리를 잡습니다.

당시 프란코 로마노라는 아주 유명한 이탈리아 밴드가 있었는데, 거기에 여자 보컬로 들어갔고 그래서 만들어진 팀이 바로 ‘나미와 머슴아들’이었죠.

이때 나미는 바로 ‘영원한 친구’를 발표해서 활동하고 이후에 남편이 될 유부남 최봉호를 만나게 됩니다.

참고로 최봉호는 이주일, 조용필, 김수철, 하춘화 등 당대 톱 스타들을 발굴하고 키웠던 연예계의 대부라고 불리던 기획 대표이사였죠.

최봉호의 나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미보다 20살 이상 연상이었고, 리버사이드 호텔과 롯데월드 유월드 호텔 북악파크의 나이트클럽도 운영했는데, 당시 자산이 1000억 원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나미가 어떻게 나이 많은 최봉호를 만나 호감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나미는 1980년도 말쯤인가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와서 회장님이라 불리던 최봉호의 사무실에서 처음 만났는데, 나미에게 ‘뭘 원하니’라고 물었는데요.

 

또한

나미의 사정을 들은 듯 “집 사줄까”라고 묻자 나미는 “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다. “음반 하나만 내야 해요.”

어느 쪽이든 최봉호에게 감동을 준 것 같다.

최봉호는 콘서트 무대에 오르는 가수들과 계약할 때 밤무대에서 노래하는 것을 금지한다고 구두로 합의했지만, 당시 다른 가수들은 조용히 자리를 떠나 몰래 공연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밤 무대.

그러나 나미는 차가운 라커룸에 혼자 앉아 있었고, 이에 최봉호는 “왜 왔냐”고 물었다. “회사 나가서 일하냐”고 묻자 “계약 때문에 출근하지 않기 때문에 왔다”고 답해 주변에서도 이를 보고 놀랐다고 한다. 스타, 너무 순진한 사람들이 있어요.

결국 최봉호는 나미와 사랑에 빠졌고, 두 사람은 금세 친해지며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최봉호에게는 실제로 아내가 있었다.

또한 최봉호는 전 부인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 한 명이 뮤지컬 배우 최낙희이다.

나미와 최봉호는 나미가 24세였던 1980년부터 동거해 왔으며, 1984년에 큰 아들 최정철을 낳았다. 이 과정에서 최봉호는 전처와 별거했다.

결국 최정철은 최봉호의 호적에는 기재되지 않고 나미의 남동생으로 기재된다.

나미는 인기 가수였기 때문에 가족들이 외출을 해야 할 때면 항상 나미가 몇 걸음 앞서 걸어갔고, 최봉호는 아기를 데리고 갔다.

한번은 백화점에서 아들을 ‘엄마’라고 부른다는 이유로 아들 앞에 선 나미에게 혼났다고 한다.

그래서 서둘러 아기를 데리고 나갔는데 백화점 직원들과 손님들이 주변을 둘러보며 나미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어서 걱정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로써 나미는 24세부터 최봉호와 비밀리에 결혼하게 됐다.

나미는 1980년대 최고의 댄스가수 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이 밝혀지면 연예계에 엄청난 폭탄이 될 수 있다. 연예기자 침묵시키기 .

 

당시

팬들은 인기 정상의 댄스 여가수 나미가 유부남과 동거를 하고 아들까지 낳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죠.

결국 나미는 ‘인디언 인형처럼’을 발표하면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전에 ‘빙글빙글’ 등의 전성기를 뛰어넘는 인기였죠.

하지만, 최봉호 사건이 터지면서 나미는 갑자기 연예계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과연 무슨 일이 발생한 것일까요?

가수 나미의 아들은 총 네 명입니다.

나미의 친아들이 두 명이고 다른 두 명은 남편 최봉호의 전처소생들이죠.

나미의 근황과 더불어 당시 최봉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인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는데요.

구속된 최봉호는 연애사업과 유흥업소 경영으로 1000억 원대의 재산을 모았다는 큰 손이죠.

또한 최봉호는 밤업소의 황제 프로덕션의 대부로 통했고, 그는 자신의 사업을 위해 조직폭력을 키우고 뒷돈을 대 우리나라 폭력계에 큰 자금원의 하나로 일찍부터 꼽혀왔죠.

검찰은 최봉호가 주류업자 정천식과 거래를 끊자 정천식의 부하가 거칠게 항의하는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이리 배차장파 두목 신진규에게 정천식에 대한 보복을 청탁했고, 대가로 세 차례에 걸쳐 3억 3500만 원을 지급했으며, 신 씨가 자수 의사를 밝히자, 신 씨에게 범행 은폐를 부탁하며 1억 원을 추가로 건네는 한편, 2억 원을 더 주기로 했다고 밝혔는데요.

나미가 ‘인디언 인형’으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할 무렵에 이 최봉호 사건이 터졌고, 결국 최봉호 역시 더 이상 연예부 기자들의 손을 막지 못하고 나미와 유부남에 대한 동거 및 이미 애가 있다는 기사가 터졌죠.

결국 큰 인기를 얻고 있던 나미는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은퇴하게 됩니다.

이후 나미는 1993년 ‘윤시네’와 듀엣 앨범을 내기도 하고, 1996년에 싱글 앨범을 발표하기도 하지만 예전의 명성을 되찾지는 못하죠.

나미는 1996년에 ‘설득’이란 노래로 잠깐 활동 재개를 했는데, 당시에 둘째가 생기면서 바로 접었는데요.

당시 나이가 쉰도 아니고 예순의 손자가 아니라 자식을 본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던 최봉호는 펄쩍 뛰었는데 남미를 말려도 낳겠다고 고집을 부리자 그래서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집을 나와 사무실 등에서 먹고 자면서 무언의 항의를 계속했는데, 이미 나미의 배는 불러오기 시작했고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나미는 늦둥이 아들을 낳게 되면서 1996년 활동을 접게 되었죠.

참고로 최봉호는 연예계의 대부로 불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슬론 머신을 최초로 도입하여 큰돈을 벌기도 합니다.

예전에 드라마 ‘빛과 그림자’의 실존 모델이기도 하죠.

 

또한

가수 나미의 아들 최정철이 2002년 QOQ 1집 앨범 라이크 무비로 가수로 데뷔하고, KBS 드라마 ‘상두야 학교 가자’ 에서 OST ‘마이 러브’를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죠.

2007년에 나미는 아들 최정철의 디지털 싱글에 참여하기도 하고, 2013년에는 싱글 ‘보유’를 발표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음악 활동을 중지한 상태입니다.

나미의 이미지가 트로트 가수가 아니라 댄스 가수였기 때문에 더욱더 활동이 어려운 것 같은데요.

이후 반포에 한정식 야미를 오픈하며 사업가로 변신했고, 현재 나미는 연예 기획사 양지 기획의 대표 최봉호 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낳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