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당 진행 아나우서 김재원…” 그의 눈물겨운 소식이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그를 진정 생각하기 시작했는데..

방송 사고가 나는 경우를 방송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로서는 가장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방송 사고가 고스란히 전파를 타고 여전히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는 장면이 있는데요.

바로 ‘6시 내 고향’과 아침 마당을 통해 시청자들과 오랜 시간 만나며 익숙한 아나운서 김재원의 ‘의자’ 방송 사고입니다.

지난 2015년 ‘6시 내 고향’ 방송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때 김재원이 앉은 의자가 쑥 내려갔고, 김재원 아나운서는 웃음이 터지는 한차례의 고비를 간신히 넘겼습니다.

하지만 김재원의 의자는 이후 멘트 중에도 서서히 계속 내려갔고, 당황한 김재원 아나운서가 제작진을 살피는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었는데요.

이후 김재원은 당시 의자가 내려가면서 “내 동영상이 전 세계 유튜브 250만 조회 수를 기록했어요. 의자가 내려가는 대한민국 최고의 방송 사고를 보여줬죠”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이어 “시청자들이 즐거워했어요. 나는 몰랐어요. 내 일에 충실했고, 옆에 있던 여자 mc가 거인이 된 걸 보고 사태를 파악했어요. 시청자와 눈높이를 맞춘 것이었죠”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습니다.

 

매일

아침 걸어서 회사에 출근하는 김재원은 한강 다리 위에서 많은 생각을 하곤 합니다.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분을 사귀기도 하고,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거나 추억을 꺼내기도 하죠.

그의 꿈은 앞으로 더 많은 곳을 여행하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며, 더 많이 가족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가 5년간 맡았던 ‘아침마당’을 하차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었습니다.

이후 이금희가 3일 전에 하차 통보를 듣고 갑작스럽게 하차하는 일까지 일어나며, ‘아침마당’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발이 심했었습니다.

김재원은 다시 ‘아침마당’에 복귀하여 여전히 여유로운 진행을 보여주고 있는데요.

1967년생으로 곧 환갑을 바라보고 있는 그는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제2의 직업을 찾고 있어요”라며 퇴직 언급을 하기도 했습니다.

귀공자 스타일의 아나운서로 어려움 하나 없이 그 자리에 올랐을 것처럼 보이지만 젊은 시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먼 타국에서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나가기도 했죠.

또한 하루도 빠짐없이 춘천과 서울을 오가며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는 아버지를 간호하는 효자이기도 했습니다.

 

김재원은

어떤 사연을 갖고 있을까요.

김재원의 어머니는 대연각 호텔에서 미용실을 운영했습니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의 미용실에서 밤을 지새운 직원들이 그만 대연각 호텔 화재로 참사를 당합니다.

어머니는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며 가슴 아파하다가 9년 후 암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에 중학교 1학년 때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김재원은 아버지와 둘이 지내게 됩니다.

아버지는 말씀이 많은 편이 아니었고, 아들은 아버지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마음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무뚝뚝한 아버지에게서 그는 태산보다 더 큰 사랑을 느끼며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헌신적으로 아들을 키웠습니다.

 

김재원은

특히 아침잠을 깨우던 아버지의 도마 소리가 잊히지 않았다고 하는데요.

어머니들의 도마 소리보다는 서툴고 투박했지만, 그래도 깊은 사랑의 울림으로 들리는 아버지의 도마 소리였습니다.

아버지는 늘 파와 소시지 등을 넣어 튼실하게 만든 계란말이를 매일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셨습니다.

사실 김재원은 계란말이가 싫었지만 내색을 못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그는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한없이 베풀기만 했습니다.

 

 

그가 대학을 마치자 엄마의 소원이었다며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자신은 한국에 홀로 남았습니다.

미시시피대에서 유학하던 1994년 어느 날, 아버지로부터 갑자기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새벽 2시쯤이었습니다.

그는 ‘한국에서 누가 시차를 잘못 계산해 한밤중에 전화를 했나 보다’라며 맘 편하지 않은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재원아, 네가 들어와서 장례를 치르고 가야겠다”라고 말하곤 아무 말씀이 없었습니다.

이야기 이후 곧바로 쓰러진 것이었습니다.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수화기를 잘못 놓아 계속 통화 중 신호만 갖고, 사촌과 친구들에게 급히 전화를 걸어 집에 가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곧바로 김재원은 공항으로 향했고, 비행기를 타고 오는 내내 혹시 아버지가 그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이며 10년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신체의 반쪽이 마비돼 거동이 불편했습니다.

그는 유학 생활을 접고 돌아와 아버지의 보호자가 됐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를 아나운서의 길로 이끈 것도 아버지입니다.

아버지 병간호를 하다가 우연히 tv에서 신입 아나운서 공채 광고를 보았고, 지나가는 말로 나도 아나운서나 한번 해볼까 했는데 아내가 다음 날 원서를 받아다 주었습니다.

사실 그의 초등학교 때 꿈도 아나운서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스물여덟의 늦깎이로 방송사에 입사한 아들을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습니다.

방송이 끝나고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라는 그의 엔딩 멘트는 시청자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투병 중에도 아들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놓치지 않고 챙겨보는 아버지를 향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방송이 끝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살가운 아들이 됐습니다.

 

이는

그가 지방 발령을 받은 후에도 계속됐습니다.

말이 쉽지 서울과 춘천을 오가며 직장 생활과 병간호를 병행한다는 게 보통 의지로 되는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나 보다’라는 생각을 할 즈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김재원은 잠시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여전히 후회가 된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면서 보낸 6년이라는 세월은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됐습니다.

2005년 회사에 무급 휴가를 내고 퇴직금을 중간 정산 받아 캐나다로 연수를 다녀온 것은 그런 여유를 세계로 확장한 것입니다.

10년간 방송을 하고 ‘나는 이대로 가다가는 매너리즘에 빠지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에 인생의

하프 타임을 설정하고, 스스로 재충전해서 후반전을 준비하자는 생각에 휴직을 하고 가족들과 캐나다로 떠나게 됩니다.

그렇게 퇴직금을 계획보다 이른 40대에 사용합니다.

부족한 부분은 일식집과 샌드위치 가게에서 설거지와 배달을 해서 충당했습니다.

그럼에도 공부는 공부대로 노동은 노동대로 일상에서 벗어난 순간순간이 행복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고마웠던 것은 그가 아들 친구들 집에 배달을 간 적도 많았는데, 아들이 한 번도 그걸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던 점이었습니다.

당시 진행하고 있던 프로그램이 3개나 되었지만,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떠나는 그의 행보를 주변에서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캐나다에서 샌드위치 가게, 스시 배달, 중국인 주방장 밑에서 설거지도 하는 등 일반 회사를 다니면서 할 수 없는 일들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니까, 그런 공부 아닌 공부도 했지만 여행을 워낙 좋아해 짬짬이 많이 돌아다녔다고 하죠.

그가 지금까지 전 세계 다녀본 55개 국 가운데 캐나다에 있을 때만 30개 국 가까이 갔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값싼 세계 항공 이용권을 구입해 두 달간 미국 동부 거쳐 유럽 전역으로 터키, 이집트, 이스라엘을 들러 태국과 일본으로 떠나 세 식구가 마음껏 여행하며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잊지 못할 추억들을 쌓았다고 합니다.

사실 캐나다의 학교생활에 익숙해진 아들은 다시 한국에 돌아오는 걸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가족이 떨어져 살 수 없다는 생각에 아이를 데리고 오긴 했지만, 한국 학교에 다시 적응하는 과정이 그리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게다가 학원까지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느낀 아들은 아버지 김재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학원은 다니지 않되, 학생의 본분인 공부는 열심히 할 것’이라는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그의 부부는 아들을 학원에 보내지 않는 대신 대학에 진학한 후에 하고 싶은 일을 하라며 아들 앞으로 돈을 모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어느 날 ‘캄보디아에서는 1천만 원이면 학교를 세울 수 있는데, 그 돈이 없어서 교육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수두룩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돈을 캄보디아 학교 설립에 쾌척하자’라는 의견을 냈습니다.

 

이렇게

굉장한 일까지 해내는 똑 부러지는 아들까지 함께하는 화목한 집안의 가장인 김재원인데요.

늘 편안한 진행으로 프로그램을 이끌어가는 김재원의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