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 김미지 결국 드러나버린 실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남자들” 그리고 가왕 나훈아가 말하는 그녀의 충격적인 폭로 내용

김지미는 김명자라는 본명으로 1940년 충남 대덕에서 태어났습니다.

8남매

넷째로 태어난 그녀는 아버지가 대기업을 운영할 정도로 꽤 부유했고, 초등학교 시절 외제차를 타고 통학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는 조금 달랐습니다.

김지미는 원래 외교관을 목표로 고등학교 때 영어를 공부했고, 당시 서울 명동에서 배꽃이라는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검은색 고무장화를 신고 들어와 “영화에 나올까 생각 중”이라며 이상하게 생긴 남자가 자주 찾아오던 곳이다. 당신은 제안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최근 영화감독으로 데뷔해 차기작에 출연할 배우를 찾기 위해 캐스팅에 바쁜 김기영 감독이었다.

김 감독은 김지미의 눈에 띄어 명동에서 광화문 자택까지 따라가며 역할을 제안했다.

 

하지만

김지미는 서울대를 나온 큰 오빠를 따라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준비하던 중이었고, 당시 미국 유학 여권 수속으로의 대사관에서 인터뷰까지 하기로 했던 상황이라 김 감독의 제안을 거절하게 되는데요.

그러나 김 감독은 자기 눈에 드는 사람은 어떻게든 데뷔를 시키고자 김지미의 집에 여러 번 찾아가며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김지미는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당시 집안의 반대가 극심했지만 이화여고 대표 미인 소리를 듣던 둘째 언니가 과거에 한 영화에 가족 몰래 출연했던 게 들통이 나서 집안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기 때문에, 김지미가 배우를 한다고 나섰을 땐 그나마 거부감이 덜했고, 결국 부모님도 허락을 해주시게 됩니다.

 

 

이후 김지미는 감독의 연락을 받고 영화사 사무실의 교복 차림으로 찾아가게 되는데, 영화사 사장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기용하길 망설였지만, 김 감독은 기지를 발휘해 교복 대신 어른 옷으로 갈아입히고, 시나리오의 장면 하나를 골라 즉흥으로 찍어서 보여주자, 그걸 보고 나서야 김지미의 캐스팅이 확정되며, 그때부터 여고생 김명자에게는 김지미라는 예명이 생기게 됩니다.

 

연기

훈련을 받아본 적도 없는 김지미는 방송 전까지만 해도 영화가 어떤 것인지 몰랐고, 촬영을 하면서도 그냥 그렇게 하라고 하면 그렇게 해야 하나 고민만 했다. 최무룡, 김징규 등 영화계 관계자는 “김지미라는 배우가 있다고 들었다. 촬영장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한 번 보러 가자”고 말하자 극도로 당황스러워하며 촬영을 종료했다.

이후 김 감독의 차기작에 출연한 김지미는 당시 남동생 역을 맡았던 아역배우 안성기와 함께 용산역에서 석탄을 훔쳐 팔며 생계를 유지하는 가난한 소녀 역을 맡았다. .

당시 김 감독은 김지미가 미모 때문에 절름발이 역할에 어울리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김지미가 석탄가루를 뒤집어쓰고 낡은 옷을 입은 채 준비된 모습으로 나타나 깜짝 놀랐다. 차림새. 옷.

그의 연기 경력은 너무 어색하게 시작되어 첫 번째 영화가 성공하자마자 캐스팅 제안이 넘쳐났습니다.

 

당시

한국 영화는 1955년에 15편이 제작되더니, 56년에는 30편, 57년에 37편, 58년에 74편, 59년 111편 등 점점 편수가 늘어나며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김지미도 한꺼번에 37편까지 겹치기로 촬영을 한 적도 있을 정도로 총망 받는 시내에서 화려한 스타로 빠르게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겹치기 출연이 잦아지다 보니 그중 한 배우와 여러 편의 영화를 동시에 찍는 경우도 있었는데요.

이 촬영 현장에서 ‘철수’라 불렀던 사람을 다른 촬영 현장에서 ‘민우’라고 불러야 하는데 잘못 부른 적도 있었고, 그때는 후시 녹음을 하던 때라 그런 실수들은 더빙 때 바로잡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도 있었는데, ‘사랑이 가기 전에’라는 영화를 찍던 도중 배우 황해가 운전하는 오토바이 뒷좌석에 탔다가 오토바이가 잔차 레일에 걸려 넘어져 15미터 이상 아스팔트 바닥에 얼굴이 쓸리게 되는데요.

얼굴 전면과 코의 피부가 파열되어 배우 일을 영영 그만둘지도 모르는 상황에 몰리며, 3개월 이상 입원을 한 김지미는 일본의 성형외과에서 재수술을 받는 등 천신만고 끝에 겨우 회복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윤정희, 남정임, 문희 ‘트로이카’의 엄앵란까지 다른 여배우들은 로맨스 영화로 경쟁할 때, 김지미는 20대 때도 할머니 분장을 하고 노인 역까지 하는 등 오직 김지미만이 다양한 역할로 맹활약했는데요.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일자로 곧게 뻗은 긴 다리에 늘씬한 팔까지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했던 그녀는 당시 한국을 방문한 존 포드 감독으로부터 할리우드로 가자는 제의까지 받았지만, 미지의 세계로 가서 어떤 대우와 보장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바람에 고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김지미는 한국 영화계에서 군림하던 홍성기 감독을 만나 여러 편의 작품을 찍게 되는데, 그러다 홍 감독이 스무 살밖에 안 된 김지미에게 끈질기게 결혼을 하자고 구해를 하자, 당시 너무 어렸던 김지미는 ‘그냥 그렇게 결혼해야 되나 보다’ 싶어 서둘러 결혼을 하게 되는데요.

결혼식이 끝나고 그 예식장에서 바로 영화 촬영도 했을 정도로 너무 경황도 없이 바쁜 상황에서 결혼식을 올렸기 때문에, ‘이게 촬영인지 진짜 결혼인지’ 혼동할 정도였던 김지미는 후에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이라는 영화에 출연하게 되는데, 하필 같은 시기에 신상옥 감독이 또 ‘성춘향’이라는 영화를 만든 바람에 두 영화는 설날 대목을 앞두고 피할 수 없는 맞대결을 펼치게 됩니다.

‘춘향전’에는 김지미 외에는 이렇다 할 스타가 없었지만, ‘성춘향’에는 이도령 역의 김진규와 방자 역의 허장강 등 조연들의 해학적 연기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었고, 3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끝에 김지미의 춘향전이 완승을 거두게 되는데요.

김지미는 이후 다른 영화들을 흥행시키며 아성을 지켰지만, 당시 자신의 영화 출연료가 30만 원이고, 집 한 채 값이 300만 원 하던 시절 남편에게 600만 원이나 제작비로 대주었지만, 홍 감독은 이후에 작품들까지 계속 실패하게 되면서, 결국 그렇게 홍 감독과 사이가 멀어지며, 김지미는 결혼 4년 반 만에 이혼을 선택하게 됩니다.

 

게다가

그 무렵 김지미는 배우 최무룡과 촬영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찾았는데, 여기서 촬영이 끝나면 같이 이동해 저기서 다시 촬영하고, 저기서 끝나면 또 그다음 장소로 같이 이동하는 등 가족보다도 더 많이 시간을 함께 보내며 서로 밤낮없이 얘기하고 러브신 하고 하다 보니 자연스레 친해지게 되는데요.

최무룡은 배우였던 아내 강효실과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지만 김지미와 결국 외도를 하게 되더니, 그렇게 김지미는 최무룡과 결혼까지 하게 되며, 이 일로 두른 간통죄로 법정 구속까지 되게 됩니다.

심지어 간통 사건이 밝혀진 시기는 아들 최민수가 태어난 지 열흘 만이었는데, 이미 최무룡에게는 10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 세 딸과 아들이 있었기 때문에 김지미는 대중들로부터 많은 욕을 먹게 되는데요.

하지만 그녀는 최무룡과의 결합을 위해 그때 가진 모든 것을 강효실 측에 주었고, 간통에 대한 비난 여론 못지않게 솔직한 이들의 사랑을 지지하는 팬도 많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결혼 후에도 김지미의 인기는 흔들리지 않았는데, 돈줄을 쥔 투자사들은 김지미를 기용하지 않으면 제작비를 대지 않겠다고 영화사를 압박하기도 했고, 또 한 감독은 김지미에게 ‘꼭 출연해 달라’며 ‘난 돈이 없습니다. 도와주시오. 돈 벌면 개런티 드리겠습니다’하고 해서 출연료 없이 출연해 주기도 했는데요.

 

그렇게

김지미는 엄앵란, 최은희, 최지희 등 동시대의 배우들이 나이를 먹으며 차츰 일선에서 물러나는 와중에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고, 심지어 어느 하루는 밤 12시까지 한 영화를 찍다가 그 후부터 해 뜨기 전까지는 또 다른 영화를 찍을 정도로 겹치기를 수십 편씩 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영화인으로서의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tv 드라마에는 한 편도 출연하지 않았고, 큰돈이 들어오는 cf도 영화로 얼굴을 팔아 광고를 찍는 게 내키지 않아 거절했는데요.

 

영화배우만으로도 이미 늘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최고 액수를 받으며 최고의 자리를 지켰지만, 최무룡과는 안타깝게도 7년 만에 결별을 하게 됩니다.

최무룡은 배우에서 감독 및 제작자로 돌아서는 과정에서 총 15편의 영화 제작에 줄줄이 실패하면서,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0억 대나 되는 무려 3천만 원의 빚을 지고 부도를 내고 말았는데요.

이혼 과정에서 최무룡은 ‘사랑해서 헤어진다’라는 웃기면서도 씁쓸한 희대의 유행어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김지미 역시 이혼 후 서서히 활동을 줄이더니, 76년 이후 6년 동안은 아예 활동을 중단하기까지 하게 되는데요.

 

당시에

바로 장안을 떠들썩하게 했던 나훈아와의 스캔들이 터지게 되는데, 노래를 잘 하는 나훈아가 김지미의 집에서 열리는 파티에 참석해 노래를 몇 번 한 적이 있는데, 이것을 계기로 가족처럼 지내다가 나훈아가 군 제대 후 일이 없던 시기에 둘은 연인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그러나 최고의 인기 가수이자 연하남인 나훈아와의 결합에 대해 당시 언론은 ‘부도덕의 대표적 케이스’라는 맹비난을 퍼부었는데요.

결국 김지미는 당시 영화계와 연락을 끊은 채 대전에서 ‘초정’이라는 음식점을 운영하며 살림에 몰두하게 됩니다.

김지미는 나훈아와의 스캔들에 대해 결혼 관계는 아니라고 주장하며, ‘연하의 남자와의 긴 연애’라고 표현했는데요.

실제로도 두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은 채 76년부터 82년까지 동거만 했는데, 김지미는 평범하게 식당을 하며 살기를 원했던 반면, 나훈아는 가수의 꿈을 놓지 못해 복귀를 하게 되면서 둘의 동거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그러다 자연스럽게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며 결국 김지미는 나훈아와도 결별을 하게 됩니다.

이혼 후 나훈아는 바로 14살 연하의 가수 정수경과 4년간 동거를 하다가 1985년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요.

이 때문인지 김지미는 나훈아를 만난 건 잘못한 것 같다며 나훈아와의 동거를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김지미는 영화계가 특정 장르의 영화만 제작하는 게 너무 짜증나고, 캐스팅 콜이 와도 의욕이 없어 “영화는 계속하면 안 된다”고 하루 종일 한탄했다. 나는 이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흥행에만 집중하고 예술성이 부족한 영화 산업에 싫증이 나서 결국 ‘지미 필름’이라는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고 자신의 영화를 제작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오랫동안 일해 온 영화인들이 일할 자리가 적어 안타까움을 느껴 중년이 되자 직장을 그만두기로 결심했고, 자신의 영화를 제작하고 주연도 맡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임권택 감독이 열심히 제작한 영화 ‘비구니’에 캐스팅되면서 의욕이 불타올랐다.

김지미는 50대 초반 대작을 창작할 기회가 있었고 심지어 머리를 삭발까지 했으나 불교계가 제작 중단을 요구하면서 뜻밖의 차질이 생겼다.

‘비구니’는 종교를 세속화하고 ‘비구니’를 모욕하는 음란한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압박에 굴복해 제작이 중단됐고, 김지미는 앞으로 연기 인생을 빛낼 중요한 자리를 잃었다.

 

그렇게

그녀는 여배우로서 좌절을 느끼며 큰 충격을 받는 바람에 이후에도 평생 치유될 수 없는 아픔으로 자리 잡게 되는데요.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심장 질환을 계기로 알게 된 심장병 전문의 이종구 박사를 알게 되어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김지미는 7~8개월간 아침 저녁으로 러브레터를 두 장씩 보내주던 남편에게 감동했고, 결혼 후 처음 월급쟁이의 아내로서 살아가는 소박한 행복을 느끼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 박사와의 결혼 생활 중 김지미는 최무룡의 부고 소식을 듣게 되는데, 김지미는 심장마비로 쓰러져 그만 세상을 떠나고만 최무룡의 빈소를 눈시울을 붉히며 찾았습니다.

“그분과 한 가정을 꾸렸었고, 함께 촬영 현장에서 동고동락하면서 영화를 배운 후배였습니다”

“고인은 인간적이고 예술가적 기질이 풍부한 사람이어서 영화처럼 살다 갔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불꽃을 영화에 바치겠다는 게 그분 생각이었는데, 아쉽게도 너무 일찍 떠났습니다”

“영화계 후배로, 영화인 협회 이사장으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긴 그분을 내 손으로 보내드리는 게 당연합니다”

 

후에

김지미는 이종구 박사와도 처음엔 월급쟁이 한 편으로 소박했던 삶을 살았지만, 남편에게 “항상 네 그러세요”라며 큰소리 한 번 치는 날도 없이 격식만 차리다 보니 거리감만 생기게 되었고, 후에 남편이 월급쟁이를 박차고 나와 강남에 병원을 차리면서 불화까지 생긴 끝에 결국 갈라서게 되는데요.

‘자신과 결혼했던 사람 중 누가 기억에 남느냐’라는 질문에 그녀는 ‘그래도 최무룡이 인간성이 참 좋았다’라며 ‘대신 성격 좋고 동료애 많은 것 때문에 맺고 끊는 게 부족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최무룡도 후에 한 매체에서 “김지미와는 홍콩에서 첫 밤을 보냈다”라는 것까지 밝히기도 했지만, 김지미는 “서울에서 처음 남녀 관계가 이루어졌다”라며 자신의 기억은 다르다고 말하기도 했는데요.

 

그녀는

또한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제가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어요. 집안 좋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집에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지 마세요. 딸이 불행해져요”

“저는 조카들에게 다른 것은 보지 말고, 그 사람의 장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 말합니다”

“완전하게 갖춰진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완전하게 갖춰진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희생이 필요하니까요”라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파란만장했던 인생을 돌아오며 김지미도 이렇게 인생의 참뜻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런 그녀도 이제 어느덧 8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는데요.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며 산전수전을 거쳐온 그녀의 남은 인생에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배우 김지미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