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장미희 씨는 정윤희 씨, 유지인 씨와 더불어 1970년대를 대표하는 2세대 여배우 트로이카 중 한 명이죠.
특히
7~80년 그런데 최고의 영화 흥행 여배우로 유명합니다.
장미희 씨는 아직까지 미혼으로 알려졌는데요.
지금도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한 장미희 씨가 결혼하지 않았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데, 정말 가슴 아픈 사연이 있더라고요.
장미희 씨는 1958년 1월 27일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유년 시절 아버지가 집을 나가 홀어머니 슬하에서 컸다고 하죠.
어릴 때는 장미정이라고 불렸는데요.
어린
시절에는 선 머슴애 같았다고 합니다.
여자인데도 축구를 좋아했는데 축구공으로 남자의 발목을 맞춰 넘어뜨렸다고 합니다.
원래 장미희 씨는 초등학교 교사가 장래희망이었는데, 훗날 명지대학교 교수를 했으니 그래도 교육자의 길로 진출하겠다는 꿈을 이뤘네요.
1975년 TBC 동양방송 특채 탤런트로 뽑혔는데요.
이듬해인 1976년 신인배우 공채 모집에서 276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주인공 ‘춘향’역에 발탁되면서 영화에 데뷔했습니다.
이듬해 1977년 ‘겨울 여자’가 5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대박을 터뜨렸는데, 이 기록은 당시 해방 이후 역대 최다 관객 동원수였죠.
전성기 때 상대역으로 출연했던 남성 배우들이 장미희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신인
시절부터 센스가 탁월했고, 작품을 분석하는 능력이나 연기력도 좋았고, 베드신처럼 어려운 연기에서도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어 상대 배우를 배려했다고 합니다.
또한 젊은 시절부터 프로 정신이 대단해서 고층 아파트에서 창문을 통해 옆 건물로 이동하거나, 눈 위에서 경주용 오토바이를 타는 장면 등 스턴트나 대역이 필요한 위험한 연기도 직접 다 해냈다고 합니다.
장미희 씨가 성공한 데에는 이런 몸을 아끼지 않는 연기력도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정윤희 씨가 외모로는 압도적으로 주목받았지만, 장미희 씨에게 연기력 면에서 라이벌 의식을 가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1980년 종합소득세 신고납부액에서 8850만 원을 신고하고, 세금 1700만 원을 납부했는데 이는 1979년 여배우 중 최고 수입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잘 나갔다는 거죠.
그러나
1982년 과거 집권 시기에 출연 금지 연예인 목록에 오르면서, 1984년까지 제대로 된 드라마 활동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유는 X양 루머로 유명한데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장미희 씨를 좋아해서 이순자 여사가 외압을 가했다는 논란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연기 공부를 위해 1982년, 1983년 두 번이나 미국 유학을 갔는데 이것 또한 장미희 씨의 공백기를 심화시키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러던 중 배창호 감독을 만나 그녀의 영화 인생은 전환점을 맡게 됩니다.
배창호 씨가 감독을 맡고 안성기 씨와 함께 주연을 맡은 ‘적도의 꽃’과 ‘깊고 푸른 밤’이 큰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입니다.
‘적도의 꽃’의 흥행 성공으로 대종상 수상을 거두게 되죠.
특히 ‘깊고 푸른 밤’은 이전의 아가씨의 모습에서 벗어나 성숙하고도 섹시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색다른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깊고 푸른 밤’의 성공으로 장미희 씨는 지적인 이미지로 완벽하게 변신했습니다.
그런데
배창호 감독이 장미희 씨에게 공개 구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당시 고래 사냥 등 대한민국에서 가장 잘나가던 배창호 감독은 굉장히 순수하면서도 수줍어하는 성격인데, 어느 날 갑자기 세간을 발칵 뒤집을 발표를 합니다.
배창호 감독이 기자들을 모아놓고 장미희 씨에게 공개 구혼을 한 것입니다.
즉 장미희 씨의 의사와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기자들에게 발표해서 기사까지 났습니다.
그러나 그다음 날, 장미희 씨는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는데요.
그래서
장미희 어머니와 친분이 있는 기자들이 직접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더니 ‘아니야. 택도 없는 소리지’라며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습니다.
하지만, 배 감독이 장미희 씨를 진심으로 사랑했다고 합니다.
훗날 라디오 방송에서 ‘장미희 씨를 사랑하냐’라고 물어보니까, 얼굴이 새빨개져 고개를 푹 숙이면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끄덕하더랍니다.
‘그래서 왜 사랑하냐?’라고 물어보니까, ‘장미희 씨가 마음이 따뜻하다’라고 했습니다.
같이
영화 작업을 하면 이름도 모르는 조연출, 조명 등 스텝들의 돌잔치, 상 등 경조사를 직접 다 챙겼는데, 선물을 사 들고 산꼭대기 언덕까지 찾아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장미희 씨는 이 공개 고훈 사건을 해명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장미희 씨가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은 따로 있었죠.
1983년 장미희 씨가 26살 때, 19살이나 차이 나는 당시 엄청나게 잘 나갔던 경남 기업 사장과 약혼했던 적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결혼 날짜까지 잡았다고 해요.
어렸을 때 아버지의 부재로 아버지 같은 따뜻한 사람을 따르지 않았나 싶어요.
이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미래를 가진 사진도 남아 있고, 두 사람이 서로 굉장히 사랑했다고 합니다.
장미희 씨 어머니도 승낙했고, 서교동 장미희 씨의 집을 드나드는 사이였으나 갑자기 기업 사정이 어렵게 되어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두 사람은 이별하게 되었습니다.
크게 상처를 받은 장미희 씨는 ‘자기는 앞으로 결혼 안 하겠다’라고 탤런트 김영자 씨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 사장도 그 후로 쭉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습니다.
주위에서 두 사람의 이런 사정을 알고 너무 안타까워했죠.
그래서 훗날 20년 뒤 장미희 씨가 56살이던 때, 선우용녀 씨가 다시 두 사람을 만나게 해 주려고 했으나, 장미희 씨가 만남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남자는 75살이네요. 너무 늦은 것 같습니다. 아프네요.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겠다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협성 여상에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화여고 졸업에 건국대 의상학과로 자신을 포장한 적이 있습니다.
경기 여고에 버금가는 명문 이화여고의 위상은 굉장했고요.
게다가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낮던 시기라 서울에 이름 있는 대학 출신이라는 것만 해도 엘리트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녀가 사칭한 것은 가장한 엘리트 코스인 셈입니다.
나중에는 장충 여자고등학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미국 호손대학교를 졸업했다고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동국대학교 청강생에 불과했습니다.
본인은 할 말이 없다며 대답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구설수에 올랐죠.
그리고
대학 강단에까지 섰으나 큰 사과 없이 바로 방송 활동을 시작했는데, 특이하게도 큰 잡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현장에서 익힌 오랜 연기생활만으로 충분히 가르칠 만하다는 반응이 많았고, 특히 학생들에게 엄청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그래서 학력 위조 사건이 났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이 도저히 장미희 씨를 자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장미희 씨를 인정했습니다.
또한
당시 규정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장미희 씨는 미국 호손대 대학을 졸업한 학력으로 명지대학교의 석사 과정을 밟았는데, 당시의 석사 과정을 밟은 사람은 대학 강단에 설 자격이 주어졌으므로 명지대학의 강단에 설 자격이 충분하다고 해당 대학교에서 인정했죠.
장미희 씨는 올해 나이 64세로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이며 현재 남자친구의 유무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장미희 씨는 드라마 ‘삼 남매가 용감하게’에 출연해 열연을 펼치고 있는데요.
드라마가 상당히 재미있습니다.
앞으로 장미희 씨가 오래오래 건강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행복하게 잘 지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