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맨 김국진은 “인생은 롤러코스터와 같다”라는 말을 했는데요.
인생에는 너무나 좋을 때도 있지만 하염없이 나쁠 때도 있다는 말인데요.
<고교얄개>라는 작품으로 유명한 이승현의 인생을 보면, 롤러코스터가 따로 없다.
이후 2019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15년 동안 유일한 혈족인 친아들과 헤어지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타깝지만 그가 선택한 삶이니까 앞으로 고통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그렇게 어린 나이에 큰 성공을 거둔 사람은 거의 없고, 그 이후로 그와 같이 실패하고 바닥을 친 사람도 거의 없습니다.
마라탕과 후라이드를 먹다보니(마라탕과 치킨 반반 먹었는데 돼지가 되는건가 싶었음) 오랜만에 옛영화가 보고싶어서 뭘볼까 고민만 했다.
소발개? 처음 듣는 얘기지만, 조사해보니 어렸을 때 추잡하고 억울한 일을 저질렀던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투박하고 개구쟁이라거나 뭐라나~ 1977년에 촬영한 영화지만 이런 고전영화를 볼 때마다 그 시대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영화 속 엑스트라 1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낯설고 생동감이 넘친다.

자세히 알아보겠다.
원조 하이틴 스타
영화배우 겸 탤런트 이승현은 1961년에 태어납니다.
그는
6살이던 1966년 영화 ‘신체의 몸’으로 데뷔해 어린 신랑 김정훈과 함께 아역배우들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사실 그는 우연히 아역 배우로 데뷔했다.
이승현의 어머니는 “승현이 첫 영화는 6살 때였다”고 말했다.
“당시 조긍하 감독님(바디패스 감독님)이 저희 집 옆 호텔에 묵고 계셨어요.”
이어 “그런데 우연히 승현을 보고 출연을 권유했다”고 회상했다.
연기를 배운 적은 없지만 타고난 연기가 탄생했다.
지금도 아역 배우들이 많지만 당시에는 이승현의 연기력을 따라잡을 수 있는 배우가 거의 없었다.
1977년 아역 배우로 활동한 이승현은 <고교 얄개>라는 작품의 주인공이 됐다.
당시 이승현은 “<고교 얄개> 주연 오디션을 봤는데 200명 모두 탈락했다”고 말했다.

“이에 감독님은 다른 드라마에 출연하는 내 모습을 보고 출연을 제의하셨다.”
“출연료로 100만 원을 받았다.당시 100만 원이면 서울에 집 한 채 살 수 있을 금액이었다 (지금 가치로는 1억원보다 훨씬 더 큰 금액)”
“얄개로만 20편을 찍었으니 집 20채를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아마 지금 4,50대 이상은 당시 나두수(얄개 시리즈의 주인공 이름) 역할을 하던 이승현의 모습이 아직 기억에 남을텐데요.
영화 <고교 얄개>는 1977년 개봉 후 관객 25만명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엄청나게 흥행하게 되었는데요.
이후 이승현을 주인공으로 세운 ‘얄개’ 시리즈가 영화계 흥행 보증 수표가 되면서 그는 엄청난 인기를 누리게 되었는데요.
그를 섭외하기 위한 경쟁까지 붙다보니 이승현의 출연료는 150만원에서 200만원 최고 500만원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당시 500만원이면 집 5채를 살 수 있는 정도였고 잘나가던 최고의 성인 배우들도 500만원 정도를 받을 때였는데 이승현은 고작 18살의 나이에 어마어마한 출연료를 받게됩니다.
그는 “요즘 말로 하면 BTS(방탄소년단), 원빈 이상의 인기었다”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그는 <결혼행진곡> <얄개행진곡> <대학 얄개> 등 100여편의 영화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습니다(얄개 시리즈는 약 20편).
이러한 활약으로 1973년 청룡영화제 장려상, 1974년 제13회 대종상 영화제 특별상, 1977년 제13회 백상예술대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얄개 시리즈로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던 이승현에게 안타깝게도 큰 시련이 닥쳐오게 됩니다.
아무도 불러주지 않아..
이승현은 “배우들이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갈 때 겪는 변신에 대한 고통은 이 일은 해보지 않은 분들은 모른다”

“이 과정을 못 견디고 영화계를 은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얄개(청소년 이미지의 이승현)가 베드신을 한다고 생각해 보라.실감이 나겠나?”
“결국 나 또한 ‘이승현 하면 고교 얄개’라는 인식이 박혀 성인 역할은커녕 일반 영화에 출연하는 것조차도 힘들었다”라며 당시의 힘듬을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이승현은 연기에 큰 차질을 겪었다.
캐나다 생활은 지옥과도 같습니다.
이에 어머니는 이승현에게 캐나다 유학을 적극 권유하며 “계속 배우로 살지 말고 해외에서 더 많은 공부를 하고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힘든 연기 생활에 지친 이승현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1986년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이 결정은 이승현에게 더 큰 시험을 안겼다.
유학 중인 삼촌의 지인을 믿고 캐나다로 떠났지만 곧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이승현은 캐나다에 홀로 남겨져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또한 이승현은 어머니의 한국 사업 실패로 힘들게 번 재산을 모두 날렸다.
이후 그는 생계를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한국 슈퍼마켓에서 식당 서빙, 청소, 육체노동, 야채와 지렁이 가지치기 등 가벼운 일을 시작했다.
그는 노숙자로 인해 7년 동안 캐나다의 거리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이승현은 “버거를 굽고, 화장실 바닥 청소를 하고, 벌레를 잡고, 손이 아프도록 낚시를 했다”고 말했다.
“나는 육체 노동을 하고,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고, 호텔에서 청소부로 일했습니다.”
“다른 나라에 가서 뭔가를 하고 싶었어요. 후회해요.”
당시 필리핀에서 의료봉사를 하던 어머니와 함께 필리핀으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이승현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목사가 되고, 독실한 크리스천인 아내를 만나 결혼도 합니다.
이승현과 부인 사이에는 아들을 한명 두게 되었죠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생활은 이승현에게 맞지 않았다.
어머니가 강제로 시키니 할 수 없이 끌려간 것일뿐 이승현의 성향과 맡지않는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승현은 1997년 가족을 데리고 다시 한국으로 귀국합니다.
처가가 있는 대전에서 ‘얄개 만두’라는 분식집을 냈지만, 이것으로 생활은 여의치가 않았다.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던 중 이승현에게는 아직 배우의 꿈도 남아 있었는데요.
배우의 꿈
그는 다시 배우가 되기위해 충무로에 가기도 했지만, 예전에 알던 분들은 모두 나이가 들거나 돌아가셔서 현직에 있지 않은 상황이라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의 이십년만에 다시 연기를 시작한 이승현은 쉽게 현재에 적응하지 못했는데.(영화 블루스, 아티스트 등).
영화 <블루스>, <아티스트>등에 비중있는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결국 흥행에 실패하여 재기에 실패합니다.
더불어 이승현이 연기 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내와의 갈등도 심각해졌는데요.
이승현 씨의 아내는 남편이 다시 배우 생활을 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합니다.
이승현은 “내가 다시 연기를 하겠다고 하자, 아내와의 다툼도 생겼어요”
“아내는 제가 옛날로 돌아가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까요.”
“그 사람은 내가 옛날에 영화배우였다는 사실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게다가 영화 바닥을 워낙 싫어하고 편견이 심했어요.배우 하면 외박, 술, 스캔들 그런 것만 생각했죠.”
“아내는 내가 배우가 아닌 목회자가 되길 바랐죠.”
결국
이승현은 연기 활동을 위해 1년여간 가족과 연락을 끊었다.
이승현과 아내가 결국 이혼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이승현은 후배들과 함께 영화사를 차렸지만 이 역시 사기로 처참하게 실패했다.
하지만 죽는 것도 쉽지 않았다. 어린 아들과 나 둘만 살던 어머니의 얼굴이 생각나서 죽음을 포기했다”고 말했다.
이후 이승현은 뮤지컬 ‘고등학생 홈커밍’ 등 영화에 조연으로 출연하며 컴백을 노리고 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주연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캐릭터만.
이승현의 비극적인 상황이 폭로되면서 40~50대 류자오의 옛날 영화 팬들이 주축이 됐고, ‘유자오 이승현 구출운동본부’까지 세웠다.
197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에게 이승현의 몰락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승현 주연의 뮤지컬에서 객석을 꽉 채우며 힘을 보탰다.
이후 영화사 측은 이승현에게 연락을 취해 착실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두 사람은 최근 만나 재혼해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양파집에서 두 번째 부인과 함께 일하는 근황도 방송을 통해 공개됐다. (간헐적으로 배우 활동에 종사)
이후 2019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는 15년 동안 유일한 혈족인 친아들과 헤어지기 위해 고군분투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타깝지만 그가 선택한 삶이니까 앞으로 고통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