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아버지 배우 송재호 세번의 시도 끝에…” 그의 뒤늦은 소식에 다시금 모두가 그에게 애도의 심정을 전달했습니다..

배우 송재호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는 연기 열정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송재호는 대중과 만나며

마지막까지 열정을 불태웠던 인물이기에 부고는 더욱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다사다난했던 고인의 삶을 되돌아보며 기리는 시간을 가져보겠습니다.

1937년생인 송재호는 평양 출신으로 한국전쟁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이어 잃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부산으로 월남 이후 1959년 부산 kbs에서 성우로 방송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보다 넓은 세상에서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에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아는 이 한 명 없는 충무로에서 우연히 먼저 연기자로 데뷔한 지인을 만나 그의 소개로 ‘하녀’로 유명한 김기영 감독을 만나 다짜고짜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내 ‘영화에는 쌍커출 없으면 출연 못한다’라는 말과 함께 퇴짜를 맞았고, 오기가 발동해 곧바로 성형외과를 찾아 쌍커풀 수술을 받기까지 했죠.

김기영 감독의 영화에는 출연하진 못했지만, 이후 박종호 감독과의 인연으로 1964년 ‘학사 주점’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의 길로 들어섭니다.

1968년 86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kbs 드라마 오디션에 합격하며 특채 탤런트로 선발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제2의 인생을 열었습니다.

이후 주연을 맡은 영화 ‘영자의 전성시대’의 흥행과 함께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극장 앞에서 골목까지 줄을 선 사람들을 보니 눈물이 났어요. 내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 사람이 그렇게 몰렸다는 사실에 감격스러웠죠”

 

 

장미희와 함께 주연을 맡은 김호성 감독의 “세 번은 짧게 세 번은 길게”도 크게 성공했습니다.

 

선한 인상 때문에

중년이 된 이후에는 주로 인정하고 정 많은 아버지 역할로 많이 출연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반항아 등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했습니다.

“그때는 항상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눈에 보이는 게 없었던 거죠. 지금은 나이 들어 주글주글해졌지만 그 시절 내 우상은 제임스 딘이었어요. 하루에 담배를 세 갑씩 피우고 양주를 두 손에 들고 병나발을 불고 술 마시고 운전한다고 개기도 부리고 그랬죠” 성격도 호방하고 적극적이었습니다.

73년부터 취미로 시작했던 사격의 실력이 일취월장에서 전국 체전에 네 번이나 출전할 정도였죠.

박종규 전 청와대 경호실장과의 인연으로 총을 잡은 뒤 클레이 사격 마니아가 됐습니다.

1979년 서울 용호구락부 소속 사격연맹의 선수로 등록됐고, 이후 전국 체전에 출전해 금메달을 딸만큼 실력이 취미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습니다.

국제사격연맹 심판 자격증도 갖춰 1986년 아시안게임 사격 종목 국제심판 1988년 서울 올림픽 사격 종목 보조 심판으로도 활약했습니다.

불교도인 어머니에게서 ‘미물이라도 함부로 죽이지 말라’라는 교육을 받았던 그는 “오래도록 사격에 빠져 살았지만 한 번도 동물 살상 목적으로 총을 들지 않았어요”라고 했습니다.

대한수렵반연합회 부회장 겸 밀렵 감시단장을 지냈던 이유죠.

 

 

‘밀렵이야말로 생태 환경을 위협하는 만행’라고 했던 그는 한 인터뷰에서 밀렵을 단속하다 목숨을 잃을 뻔한 위협을 겪기도 했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대 한국 영화가 쇠락하면서 영화와 점점 멀어진 뒤엔 주 무대를 tv로 옮겼습니다.

가족 드라마와 시대극 청춘 드라마를 오가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조연이나 단역 배우들에게

인격적인 배우를 하지 않는 영화 현장에 대한 불만으로 영화계를 멀리했던 그는 2001년 개봉한 ‘무사’ 출연을 계기로 다시 충무로로 돌아옵니다.

이후 봉준호 감독의 출세작 ‘살인의 추억’을 비롯해 ‘그때 그 사람들’, ‘화려한 휴가’, ‘해운대’ 등에 출연했습니다.

2013년까지는 매년 한 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이후 2년에 한 편 식으로 출연작이 줄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9년 개봉한 ‘자전차왕 엄복동’, ‘질투의 역사’로 충무로와 작별을 고했습니다.

이렇게 남들이 보기에 매우 호탕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을 것 같은 송재호였지만 사실 속으로는 굶고 있었습니다.

혈기 왕성하고 성공 가도를 달리던 송재호는 30대 초반에 영화 제작자로 나섰지만, 곧바로 망해서 1억 원이 넘는 빚을 지게 됩니다.

엄청난 빚 때문에 은행을 이용하는 것에 한계를 느껴 사채를 쓰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사채로 빚을 갚는 등 빚으로 빚을 갚는 악순환이 계속됐죠

한 번은 사채업자에게 하도 시달려 날붙이를 내 배에 대고 ‘오지마, 한 발자국만 더 오면 확 그어버릴 거야’라고 위협을 가해, 사채업자들의 봉변을 모면할 수 있었어요.

“너무 괴로웠고 삶의 희망도 보이지 않았어요. 늘 쫓기듯 찌들어 사는 인생이 너무 힘든 나머지 목숨을 끊으려고 세 번이나 시도했었죠. 약을 먹고 끊으려고 했는데 실패했어요.”

힘든 생활 속에서 양주 2병을 한 입에 물고 ‘나발’을 불고 하루 다섯 갑의 담배를 피웠던 송재호는 1980년 고정 출연하던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만난 패널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가게 되면서 차츰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송재호에게 시련은 그치지 않습니다.

다시 영화 제작자로 재기를 시도했던 2천 년, 영화사를 차렸지만 2001년 미국 세계무역센터 테러로 인해 뉴욕 현지 촬영 영화가 무산되면서 다시 경제적인 타격을 받습니다.

 

게다가

막내아들까지 교통사고로 잃게 되죠.

그는 그 충격으로 한동안 병원 신세를 지기도 했고, 극심한 충격과 분노로 단기 기억 상실증을 앓기까지 했습니다.

“교통사고가 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히 강릉으로 달려갔는데 이미 세상 사람이 아니었어요. 우리 막내가 먼저 가다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더라고요 스물여덟 딱 튀어나온 장성한 아들 다섯 자식 가운데서도 막내라서 유난히 정이 많이 가는 아이였어요.”

그러나 힘들었던 막내아들의 사고는 그의 가족을 다시 뭉치게 했고, 비뚤어진 생활을 하던 큰아들도 마흔이 넘어 성직자가 되면서 다시 용기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송재호는 2005년이 되어서야 겨우 빚과 이자를 모두 갚게 됩니다.

50년을 이자를 갚기 위한 인생으로 살았던 셈이죠.

이 모든 일을 혼자 견딘 것은 아닙니다.

일찍 결혼했기 때문에 부인이 항상 옆에 있었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나는 모른 척하고 있고 집사람이 알아서 다 해결했어요. 아이들도 모두 사회에서 제 몫을 하게끔 반듯하게 키워주었고요. 아내가 세상을 뜨면 나는 울음이 그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래서 ‘내가 먼저 가야지’라는 생각을 하죠. 내가 집사람에게 해준 게 없어서 그 어떤 말로도 고마움을 대신할 수 없어서 미안해요.”

 

그동안 공개하지 않았던

부인과 관련된 내용은 매체를 통해 일부 알려진 게 전부였습니다.

2011년 ytn 뉴스에 출연해 당시 출연했던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와 관련한 인터뷰를 가졌습니다.

실제 부인에게도 영화처럼 잘해주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죠.

“잘해주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긋나는 게 있어요. 아내는 첫사랑으로 한 살 연하인데 친구처럼 지내지만 내가 많이 좋아해요. 아내가 뭐라고 하면 무조건 ‘알았다’라고 하고 말을 잘 들으려고 해요.”

하지만 측근에 따르면 아내는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는 생전 연기에 대한 생각을 다음과 같은 말로 대신했습니다.

“나이가 90이 되더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계속 연기할 수 있는 연기자란 직업을 택한 게 후회 없고 행복하다”

송재호의 실제 모습은 드라마 ‘부모님 전상서’와 가장 흡사하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온갖 풍파를 겪었지만

내색도 없이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 말이죠.

그리고 2020년 11월 7일 1년 이상 앓던 숙환으로 그는 숨을 거둡니다.

고인은 연기뿐만 아니라 사회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냈습니다.

밀렵감시단장 야생생물관리 협회 회장뿐만 아니라 방송 배우들이 해묵은 출연료 미지급에 항의하며 파업을 선언했을 때도 후배들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작품이 있기에 여전히 그의 부재가 실감이 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먼 곳으로 떠났지만 여전히 그리운 그가 부디 그곳에서 편히 쉬시길 바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