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빠져 안타까운 비보가 전달되었습니다…” 김병만 그리고 모친의 안타까운 소식을 지금 확인해보실 수 있습니다.

최근 김병만 씨 모친 별세에 관련한 글이 인터넷이 다수 보이는데요.

저는 김병만씨의 기사를

통해 이런 슬픈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체 왜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났는지 막상 궁금해져 기사를 보니, “김병만 모친 갯벌 사고로 별세..”라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김병만 씨 어머니 정점순님이 안타까운 사고로 돌아가셨는데, 그 사고는 작년 5월 3일 전북 부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전북 부안 해양경찰서에 따르면 김병만 씨의 어머니를 포함한 3명은 5월 3일 오전 11시 30분쯤 전북 부안군 변산면 하섬 일대 갯벌에서 조개를 채취하다가 밀물에 고립됐다고 합니다.

 

 

부안 해경은 목격자 신고를 받고 구조대를 급하게 바위에 고립된 두 명을 구조했지만, 119구조대와 함께 일대 해상을 수색한 끝에 알고 보니 김병만 씨 모친 정점순 씨는 표류 중이었고, 그 모습을 119 구조대가 발견해 인근 병원으로 이송했으나 끝내 숨졌다고 하는데요.

 

일단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제일 첫 번째 원인이 오전 8시쯤부터 약 4시간 동안 갯벌에서 조개 채취 등을 하다가 바닷물이 들어오는 때를 늦게 인지해 사고를 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망 사고가 발생한 부안 하섬 일대는 지역 주민들이 어업 활동 등의 이유로 바닷가에 자주 출입하는 지역이기도 하고, 탐방객들도 왕래가 잦은 곳이라 이런 곳에서 사고가 날 줄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겁니다.

모두 추억을 쌓으러 떠난 곳에서 예기치 못하게 당한 사고라 더 마음 아픈 것 같은데요.

김병만 씨가 얼마 전 스카이다이빙 사고로 크게 다치는 사고를 당한 만큼 더 마음이 쓰이고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스카이다이빙 사고 후 ‘정글의 법칙’ 아일랜드 편을 마지막으로 모든 방송을 하차해야 했던 그의 눈물 나는 인생과 최근 근황을 알아보겠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 가정 환경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꽤 부유하셨던 할아버지가 재산의 절반을 큰 아버지에게 물려주시고 나머지 절반은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고모 이렇게 세 분께 나눠주셨다고 하는데요.

아버지가 그 돈으로 ‘집 짓는다’, ‘양장점 한다’ 여러 가지 사업을 시작하셨지만 쉽게 말해 다 날렸죠.

그나마 산과 밭 조금 남았는데, 그마저도 다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김병만은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집에 오면 일을 했는데 망치질에, 도끼질에 ‘다시 태어나면 농촌에서 안 태어나겠다’라고 할 정도로 일을 많이 했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때는 별로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학교 다니면서 빨리 졸업해서 우리 집에 빚을 갚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자신이 집안에서 유일한 아들이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그는 개그맨이 되는 방법도 몰랐고, 그저 tv를 통해 개그맨들을 봤을 때 ‘하늘에 떠 있는 별 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죠.

그 당시 김병만의 꿈은 단순한 기술자였고, 그저 빨리 기술을 배워 돈을 벌어서 어머니를 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는 이런 상황에서 일찌감치 대학을 포기했고, 직업 훈련소에 가서 일하면서 자격증을 땄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병만은 tv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에 출연한 친구의 모습을 우연히 보았고, 그 친구의 모습을 보며 ‘저 친구가 하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과 이렇게 돈을 벌어서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생각을 하였죠.

그러면서 김병만은 ‘내가 진짜 하고 싶고, 내가 즐길 수 있는 걸 하자’라는 결의로 과감히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어머니께 30만 원을 받아 바로 상경해서 곧장 연기학원에 등록했지만, 연기 학원에 다니는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키의 촌스러움이 묻어 있었기에 김병만은 배역을 얻지 못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에 맞닥뜨렸죠.

김병만은 체육관 일을 도우며, 숙박을 해결하며, 간신히 연기학원에 다녔는데 체육관에는 샤워실이 없었습니다.

 

 

여름에 너무 더워 새벽도 3시쯤에 아무도 없는 새벽 공용 화장실에서 샤워하다 경비 아저씨께 들켜 옷을 입지도 못한 채 혼이 나는 상황을 겪기도 했는데 그때 한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길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그런 나날을 버티면서 연기 학원 수료를 앞두고 진행된 개인 면담에서 원장님에게 ‘너는 키가 작아서 힘들 거다. 오디션을 봐도 감점 요인이 많을 거다. 다른 이를 찾아보라’라는 말을 들었죠.

김병만은 그때 속으로 ‘시작할 때 진작 알려주지’라는 생각도 했지만, ‘두고 봐라. 사람 잘못 봤다’라고 일을 갈면서 극단에 들어가 연기를 배우며 매년 개그맨 공채에 응시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개그맨 공채에 무려 여섯 차례나 연이어 낙방하고 말았는데, 시험에 앞서 연습할 때에는 완벽했지만 울렁증이 심해 실전에서는 실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죠.

그래서 그는 시험장에만 서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긴장 때문에 불합격 통지를 받는 일이 반복되기만 했습니다.

개그맨 공채 시험은 1년에 한 번 있는 것이기에 떨어지면 1년을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고, 김병만은 도무지 생활이 어려워 신문 배달을 비롯한 통신, 전기, 배관, 각종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유지해 나갔죠.

그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배움과 동시에 돈이 조금씩 모이자 꿈에 대한 열정을 잃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김병만은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어 생활비가 충당되면 다시 연습에만 매진했고, 이런 날이 반복되고 있을 때 2000년에 방송국 피디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그에게 걸려오는데요.

그 전화는 그에게 개그 페스티벌 참가를 권하는 전화였고, 그는 당연히 하겠다고 답합니다.

 

생활비가

없었기에 김병만은 시골로 다시 내려가 동네 아주머니와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 개그를 하며 열심히 연습했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그는 개그 페스티벌에서 당당히 2등을 할 수 있었고, 거기서 추천을 받아 영화 ‘선물’ 오디션도 볼 수 있었죠.

김병만은 그곳에서 개그맨 지망생이던 이수근을 만나 함께 호흡을 맞추며 오디션 결승까지 올라갔고, 마지막 장면을 촬영하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영화감독이 ‘이런 애들이 개그 콘서트에 나와야 하는데’하며 박장대소하였는데요.

그와 이수근은 감독의 추천을 받아 개그 콘서트에 출연 기회를 얻게 됩니다.

처음 출연 기회를 얻었을 때 그는 이제 개그맨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2001년 치렀던 개그맨 시험에서 또다시 불합격의 아픔을 겪어야만 했죠.

개그 콘서트에 출연하고 있음에도 개그 콘서트 공채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는데, 그는 신선함이 없다는 충고를 듣고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럼에도 김병만은 개그맨 지망생으로 개그 콘서트 무대에 계속 올랐었고, 속으로 ‘이러면 그냥 공채로 붙여주지’라는 아쉬움도 많이 들었죠.

그렇게 힘들게 개그맨 지망생으로 활동하다 생활고 때문에 이수근은 중간에 다른 길을 가야만 했고, 사정을 알던 그는 차마 이수근을 붙잡을 수 없었는데요.

 

하지만

김병만은 방송국에서 연락이와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 ‘무림남녀’ 코너를 하게 되었고, 2002년에 드디어 개그맨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죠.

오랜 고생 끝에 개그맨의 꿈을 이뤘을 때는 환호성이 아닌 그저 소리 없는 눈물만이 계속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다 김병만은 뒤늦게 자신의 울렁증 원인을 깨달았는데 바로 무대에 올라오기 전에 ‘실패하면 어쩌지, 틀리면 어쩌지, 대사가 생각 안 나면 사람들이 안 웃으면 어떡하지’ 식으로 무대에 오르기 전에 걱정만 앞섰던 것인데요.

그가 긴장하는 모습을 본 개그 콘서트 피디는 그에게 ‘죄송해 하지 마. 더듬는 거 그것도 정답이야. 틀려도 계속해 무대에서는 누구도 너를 도와줄 수 없어. 네가 정답이야. 네가 틀린 이야기를 해도 긴장하지 마’라고 조언을 해주었죠.

그때부터 김병만은 실패 상황을 예상하며 무대 연습을 했고 생각을 바꾸니 여유가 생기면서 실수를 하더라도 무대가 편안해졌으며 마침내 무대 울렁증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가 실패를 두려워하여 한 번 실패한 후에 도전하는 걸 포기했었다면, 지금 우리가 아는 달인 김병만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김병만은 지난 2017년 미국 캘리포니아 엘시노어에서 국내 스카이다이빙 국가대표 세계대회 준비를 위해 자격증을 취득 후 팀 훈련을 받던 중 급변하는 바람 방향으로 인해 랜딩 시 부상을 당했었던 아찔한 순간을 회상하였는데요.

당시 4명과 함께 점프를 하게 되어 떨어지는 속도를 맞추기 위해 웨이트 10킬로그램을 착용 후 점프를 했다고 합니다.

항상 랜딩을 하기 전에 속도를 붙이는 높이가 있는데 당시에 더 높은 데에서 속도를 붙이는 스키를 썼었어야 했는데, 김병만은 10킬로그램을 허리에 차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채 그 순간에도 평소 높이에 했던 스키를 썼다고 하는데요.

 

땅에 내려올 때는

땅에서 치듯 지나와서 랜딩을 해야 하는데, 낙하산이 평평하게 펴지기 전에 땅에 부딪히게 되었고 땅에 부딪힐 때 최대한 늦게 부딪히려고 다리를 오므렸는데 오므리면서 엉덩이가 부딪혀 척추가 압박골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 순간 ‘아 내가 한동안 움직일 수 없겠구나’라는 느낌을 받았다는 김병만 씨.

통증이 밀려오면서 많은 사람들이 본인 앞에 왔을 때 자기 실수에 대한 창피도 있었지만, 생각보다 밝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요.

이후 김병만 씨는 병원 입원 후 재활 치료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언제 재활을 해서 다시 이 자리에 돌아올 수 있을까? 옛날만큼 역동적으로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100% 회복할 수 있을까?’ 하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요.

사실 지금도 100% 회복은 아니고, 그때는 100의 유연성이라면 지금은 70~80의 유연성으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며 관리를 하면서 유지를 하고 있다고 하죠.

하지만 이게 트라우마로는 남지는 않았다고 하는데요.

 

지금도

뛰어내리라고 하면 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게 잘 배워왔기에 그리움이 더 크다는 김병만 씨.

병원에 있는 동안 움직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하다가, 그때 본인이 정말 조정을 해보고 싶었는데 비행 공부를 시작해 보자고 결심하게 되었다고 하죠.

시험은 너무 어려웠지만 비행 이론을 다섯 번 만에, 교통 통신을 네 번 만에, 항법은 한 번 만에 붙고, 항공법은 서너 번 만에 붙었으며, 항공 기상은 다섯 번 만에 붙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총 다섯 과목 통과를 하고 다음 총 비행시간 40시간을 채우고 한 번에 합격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허리 부상 후에도 계속해서 다른 방식으로 하늘을 날고 있다고 합니다.

‘언젠간 비행기를 직접 몰고 하늘로 올라가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릴 날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는 김병만 씨.

큰 부상을 딛고 힘든 시기에도 또 다른 꿈을 향해 도전하는 열정이 정말 멋집니다.

저도 김병만 씨의 아름다운 비행을 응원하겠습니다.

김병만 씨와 가족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방송에서 자주 볼 수 있길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