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년 83세 가수 오기택…” 이렇게 세상을 떠날줄이야.. 그리고 현재 난리난 “그의 전 재산의 충격적인 횡방…” 그 많은 돈이 어디로..

‘아빠의 청춘’, ‘영등포의 밤’ 등으로 1960년대를 풍미한 원로 가수 오기택 씨가 지병인 뇌출혈 투병 중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나이

향년 83세였습니다.

‘저음의 마법사’라 불리며 중후한 목소리의 가수였던 고 오기택 님 1939년 전남 해남의 한 바닷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 사업하시는 부친을 따라 해남과 목포를 오가며 초등학교를 세 번이나 옮겨야 했을 정도로 환경의 변화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1961년 그는 제1회 KBS 직장인 콩쿠르의 동화 백화점에 대표로 출전하게 되어 창작곡 ‘비극에 운다’로 1등을 차지하게 됩니다.

 

 

보통 아마추어 콩쿠르라 하면 관객이나 심사위원들에게 친숙한 곡을 부르는 게 일반적인데 오기택 님이 창작곡으로 출전을 했다는 사실은 그만큼 가창력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일 겁니다.

 

그리고

이 대회를 tv 중계로 지켜보았던 작곡가 김부해 씨.

당시 그는 ‘대전 블루스’, ‘댄서의 순정’ 등으로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스타 작곡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오기택 씨를 보고 한 걸음에 만나러 찾아온 것입니다.

그렇게 실력을 인정받은 오기택 씨는 곧바로 김부해 씨가 문예부장으로 있던 메이저 음반사 ‘신세기’의 전속 가수 계약을 맺게 됩니다.

음반 취입 없이 테스트만으로 전속이 된 매우 독특한 케이스로 그만큼 당시 오기택 씨의 음악적 역량은 특출났습니다.

1962년 계약금 5천 원을 받고 전속 가수가 된 오기택은 ‘우중의 여인’, ‘영등포의 밤’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신세기 음반사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하였는데요.

특히 그를 스타로 만들어준 노래는 바로 ‘영등포의 밤’이었습니다.

훗날 ‘영등포의 밤’의 노래의 무대인 서울 영등포구에서는 이 노래를 기리는 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히트곡을 내며 큰 주목을 받았던 오기택.

 

 

그는 얼마 뒤

해병대 군예대에 입대하며 군 복무를 하게 됩니다.

그가 군대에 갔어도 TV와 라디오에는 계속해서 그의 노래가 들렸고, 군 복무 중에도 틈틈이 음반을 취입하여 공백기 없이 계속해서 히트곡을 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 제대 후 ‘고향 무정’, ‘아빠의 청춘’, ‘남산 블루스’, ‘충청도 아줌마’, ‘비 내리는 판문점’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며 그야말로 1960년대의 최고 인기 가수로 등극하게 됩니다.

여러 노래들이 있지만 그중 특히 ‘아빠의 청춘’ 이 노래는 당시뿐만 아니라 그 후인 1980년대 1990년대에도 이른바 부권 상실이라는 사회 현상과 맞물리면서 그 시절의 아버지들을 위로하는 곡으로 주목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로 위로를 건네었던 그는 특유의 매력적인 저음으로 ‘저음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합니다.

한동안 국내 활동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던 그는 일본을 오가며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6년간 밤무대 가수로 활동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국내로 돌아온 그는 한국연예협회 가수분과위원장을 맡아 가수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앞장을 서게 됩니다.

고인은 가수 활동 외에도 만능 스포츠맨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가수 이력서는 두 장 분량이지만 골프 이력서는 네 장 분량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골프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대회에 나가 수차례 입상을 할 정도로 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하는데요.

덕분에 그의 집에는 트로피와 메달이 벽과 진열장을 가득 채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골프 말고 좋아하는 또 한 가지는 바로 낚시로 그 낚시 때문에 그의 인생이 또 한 번 바뀌게 됩니다.

굉장한 낚시광이자 낚시꾼이었던 오기택.

그는 1996년 12월 31일 새해맞이를 겸해 추자도의 무인도 ‘염섬’을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엄청난 폭풍이 몰아쳐 섬에 고립이 되고 맙니다.

 

 

거기에 더해 그렇게 거친 폭풍 속에서 갑자기 몸에 빈혈 증세가 찾아왔고, 왼쪽 팔과 다리에 마비 현상을 겪게 됩니다.

결국 몸을 주체할 수 없어 넘어지게 되는데 하필 넘어진 곳이 바다 쪽 경사진 위험한 곳으로, 몸을 움직일 때마다 자꾸 바다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급박한 상황.

거친 눈보라 속에서 말을 듣지 않는 몸으로 한쪽 팔은 소나무 가지를 잡고 한쪽 다리로는 소나무에 걸쳐 버티면서 홀로 구조를 기다렸습니다.

배가 고프면 소나무 잎을 씹고, 쏟아지는 졸음을 쫓기 위해 쉴 새 없이 노래를 불렀던 오기택 씨.

해병대를 나온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 덕분이었을까요.

정신을 잃으면 곧바로 죽는다는 생각에 그는 주위에 아는 사람 모두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기도 하고,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버티기를 무려 스물네 시간.

 

다음 날

낚시꾼 배에 의해 구조되어 기적적으로 생명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생명을 구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치열하게 생과 사의 고비를 넘나들었던 탓일까요.

이 사고로 인해 그는 반신불수가 되고 맙니다.

이후 십여 년 동안 각종 재활 훈련을 통해 차츰 건강을 회복하는가 싶었지만, 최근 증세가 악화되어 자택에서 유명을 달리하였습니다.

자신의 고향인 해남을 지극히 사랑했던 오기택 님 노래 ‘해남 땅끝 마을 내 고향’을 직접 작사했을 만큼 고향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습니다.

평생 미혼으로 지낸 고 오기택 님은 세상을 떠나며 자신의 모든 재산을 고향 후배들을 위해 해남 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합니다.

 

고인이 얼마나

고향에 대한 애정이 깊었는지 느낄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의 고향인 해남에서는 2007년부터 매년 오기택 전국 가요제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8년에는 오기택 노래비까지도 세워졌다고 하는데요.

그윽하면서도 중후한 저음의 목소리로 서민들의 애환을 노래하였던 가수 오기택 님.

그리고 가수들의 친목과 권익을 위해 힘썼던 고 오기택 님.

그는 떠났지만 그의 노래는 영원히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