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이제 그만 하려고요… “갑작스러운 가수 진성의 은퇴 발표..” 62세 나이에 그가 이른 결정을 내리게된 충격적인 이유..

진진성 씨는 어린 시절 두 번이나 어머니에게 버림을 받았습니다.

홍역 접종을 하지도 않은 3살 때 어머니가 집을 나가버렸어요.

당시는

많은 어린이들이 홍역으로 사망했습니다.

어렸을 때 그는 아무도 그를 제대로 돌봐주지 않았기 때문에 예방접종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30대가 될 때까지 홍역 예방접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어머니께 말씀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었어요.

어머니가 도망가시자 아버지도 어머니를 찾으러 달려갔습니다.

결국 아이는 친할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아이가 4살이 되던 해 할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누워 지내다가 3년 뒤 세상을 떠났다.

이후 진성은 그렇게 어린 나이에 친척집에서 저집으로 살아가야 했다.

 

진성 씨는

1960년생인데요.

1960년대는 대부분의 국민이 가난한 시절로 자기 식구 건사하기도 힘든 때인데, 남의 식구인 어린 진성은 더욱 굶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루에 겨우 고구마 하나로 버틸 때가 부지기수였다고 해요.

부모님이 없는 것도 서러운데 배고픈 설움마저 견뎌야 했던 어린 진성에게 가장 큰 위안은 노래였습니다.

그때는 라디오 시절이었는데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애달픈 노래의 가사가 자기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아 더욱 노래에 빠져들었어요.

더구나 진성 씨는 노래에 타고난 재능이 있었습니다.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듣고 다음날 불렀어요.

나도 어깨 너머로 보면서 창 만드는 법을 배웠고, 지금도 창 만드는 걸 보면 수준이 높다.

배가 고파서 산에 가서 허기를 달래기 위해 멈춰 진달래를 먹었고, 외로워서 노래를 부르며 돌아다녔습니다.

당시 불렀던 곡은 이미지의 ‘동백소녀’와 ‘기러기아빠’였다. 아이의 슬픈 노래를 듣고 논밭에서 일하시는 어르신들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아이가 왜 그렇게 슬픈 노래를 부르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음식과 동전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식량을 얻기 위해 논과 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불렀다.

그런데 학교에 갈 나이가 됐는데도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서 호적도 없이 초등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제가 10살쯤 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부모님이 나를 버리시면 고아원에 버리실 거예요. 그들은 나를 고아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무료로 보내고 음식도 먹였습니다.

나는 고아보다 더 나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와 헤어진 지 8년이 지났고, 11살 때 어머니를 다시 만나 우리 가족은 함께 이사했습니다.

진성은 12살 때 처음으로 학교에 다녔다.

나이 때문에 바로 4학년으로 진학했어요.

 

그런데

다시 합친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심하게 싸웠고, 결국 외삼촌이 어머니를 데리러 왔습니다.

어머니 없이 너무나 굶주렸던 어린아이는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며 외삼촌과 어머니를 쫓아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왔어요.

버스를 타는 어머니를 따라 자기도 버스에 올라타려는 순간, 외삼촌이 군홧발로 어린아이의 가슴팍을 찼고 당시 진흙 투성이었던 버스정류장 바닥에 떨어진 어린 진성의 가슴속에는 그만 한이 맺히고 말았습니다.

부모님이 원수같이 느껴지고, 다시는 그들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어요.

다시 만난 어머니와 1년 정도 같이 살다가, 또다시 어머니에게 버림을 당한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렇게 12살의 어린 진성은 또다시 고아보다 못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유랑 극단을 따라 떠돌아다녔기 때문이죠.

그 후 다 가는 중학교에 유일하게 홀로 가지 못하고, 교복 입은 친구들이 부러워 숨어 다니며 배회하다가 우연히 6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는데요.

그에게 서울에 올라가 기술을 배우라며 얼마 간의 차비와 숙식비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14살에 홀로 서울로 상경했어요.

그때부터 먹고살기 위해 중국집 배달 일부터 시작해 닥치는 대로 일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가수에 대한 꿈을 잃지 않아 15~16살에 유랑 극단에서 일하기도 하고, 17~18살에 야간 업소에서 가수 일을 시작합니다.

물론 노래만 부른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허드렛일 등 잡일도 함께 하는 땜빵 가수였죠.

다시는 부모님을 찾지 않으리라 다짐했지만, 저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가 유명한 가수가 되면 부모님이 자기를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다고 해요.

 

그 당시

자신의 신세가 마치 돈이지만, 값어치 없는 동전 같다고 느꼈는데 이 또한 훗날 그가 지은 가사의 노래로 탄생하죠.

그 후 20대가 되어서는 밤무대와 노가다를 하면서 술로 외로움을 채우는 날들의 연속이었습니다.

“20대에 야간 업소를 전전하면서 새벽 1시에 일이 끝나면 마음이 공허한 거예요. 집에 가봐야 반겨줄 사람도 없잖아요. 밖에서 뱅뱅 돌다가 친구한테 전화해서 시장에서 만나자고 해요. 삼삼오오 모이면 동이 틀 때까지 마시고, 그대로 집에 가서 쓰러져 자고 야간 업소에서 놀이하면서도 낮에는 건축사무소를 다녔어요. 아침에 별 보고 나가서 별 보고 들어오면서 그렇게 열심히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야간 업소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작사가가 다가와 메들리 가수를 제안해서 25살 때 처음으로 메들리 음반을 출시합니다.

거의 20년간 메들리 가수로 활동하며 100집 이상을 만들었고, 메들리 업계에서는 인정받는 가수가 되었지만 아직도 그는 대중에게는 무명 가수였어요.

남의 곡을 부르는 메들리 가수에서 자신의 곡을 부르고 싶었던 그는 ‘님의 등불’, ‘내가 바보야’ 등을 냈지만 당시에는 철저히 외면당했습니다.

나중에 역주행해서야 뜨게 됩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지만 30대에도 여전히 밤무대를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밤무대에서 유혹도 적지 않았어요.

“1990년대 초반에 업소에서 노래하면 아줌마들이 그걸 보고 인터폰으로 불러요. 나는 잘 안 갔어요. 근데 술을 팔아야 하니 웨이터들이 우리를 이용해 먹어요. 인사 한 번만 드리면 양주 15만 원짜리 하나 들어가니까 좀 도와달라고, 같은 업장에서 일하는 사람이 먹고살겠다는데 모른 척할 수도 없잖아요. 들어가면 아줌마들이 만 원짜리 다섯 장을 팁으로 줘요. 절대 안 받았어요. 그 팁을 받으면 마음이 무너져 버리거든요”

지금 화폐 가치로는 적지 않은 돈이지만 너무나 자존심이 상했고, 그렇게 살면 자기가 삼류가 될 것 같아 도저히 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실 주변에는 잘 사는 사모님 하나 잡아서 팔자 고치는 노래하는 제비족도 꽤 있었다고 해요.

 

그러다

그의 인생에 서서히 서광이 비치기 시작합니다.

바로 ‘태클을 걸지마’인데요. 그는 이 노래를 직접 작사 작곡했어요.

아버지 무덤에 갔다가 이 노래를 짓게 되었습니다.

막걸리 한 잔 올리고 자기도 술 한잔하고 있는데 갑자기 아버지 환청이 들렸나고 해요.

“너는 그 계통에서 그렇게 오래된 녀석이 왜 아직도 헤매고 있냐. 누가 너에게 태클을 거는 사람이 있으면, 아비가 다 막아줄 테니 마음껏 한번 날아봐라”

이 말을 듣고 불과 5분 만에 가사와 멜로디가 동시에 나왔다고 합니다.

‘태클을 걸지마’ 노래는 사실 자기의 비참한 삶에 대한 절규였다고 해요.

그러나 아직도 전국적으로 그의 이름이 알려진 것은 아니었어요.

그 후 2012년 ‘안동역에서’라는 노래가 뜨면서 대한민국 곳곳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1년 반 정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지죠.

젊은 시절에 술로 외로움을 달래는 나날을 보내서 그런지 그는 암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병 두 개가 한꺼번에 옵니다.

암뿐만 아니라 심장 판막증까지, 사실 심장 판막증만 해도 대단히 위험한 병인데 림프종 혈액암까지 걸린 것이었어요.

10대 가수 생활을 시작해 40년 만에 무명을 벗고, 이제 겨우 성공 가도를 달리려는 순간 너무나 가혹한 시련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때가 2016년 12월 29일로 2017년이 다 된 때였습니다.

 

알고 보니

심장 판막증이면 노래 부르는 것도 버겁다고 해요.

“심장 판막증 진단받고 한두 달 더 노래하겠다고 버텼으면 이미 죽었을 거예요. 노래 부르고 나면 가슴이 담긴 적도 많았거든요. 길거리에 그냥 주저앉아서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음 스케줄 장소로 이동했던 적도 많아요”

이제 막 뜨기 시작해서 또다시 잊혀질까 봐 두려워 참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무대에서 쓰러지기까지 해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심장이 좋지 않아 암 치료를 바로 할 수가 없었어요.

항암 약물 치료를 해야 하는데 심장에 무리가 와 쇼크사 할 수가 있어서 한 달간 심장부터 다스린 뒤에 항암 치료를 시작했죠.

나중에 수술을 하는데 끔찍한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가수의 생명과도 같은 목 부분에 무려 20센티미터 넘게 절개해야 했습니다.

죽음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사실 너무 힘들어 ‘생을 포기할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고 해요.

 

그걸

극복하고 항암 6차까지 마쳤습니다.

그렇게 6개월 정도를 병상에 누워 있자 근육이 다 빠져 걷지를 못할 정도가 되기도 했어요.

세상을 다 잃은 듯한 표정, 알고 보니 진성 씨가 혈액암 투병 중이라는 것은 우연히 알려졌다고 해요.

병원에서 근무하는 미화원 아주머니가 그를 알아보고 입소문을 내서 신문 기사가 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퇴원하자마자 바로 방송에 출연했습니다.

2017년 5월 ‘아침마당’ 잊혀지는 것이 가장 두려웠던 그는 몸 추스를 새도 없이 다시 방송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죠.

“30년, 40년간 무명 생활하다가 이제 겨우 여러분께 좀 알려졌는데 잊혀 가는 게 또 너무 두려운 거예요”

그렇게 다시 일어난 그는 ‘보릿고개’, ‘가지마’, ‘동전 인생’, ‘못난놈’까지 모두 히트시켰는데요.

이 노래들은 모두 진성 씨가 직접 작사했습니다.

가사들이 정말 가슴 절절하게 와닿고 옛 시절을 회상하게 만드는데요.

모두 자신의 인생 경험을 담아 써서 그렇다고 하죠.

그는 이제는 노래뿐만 아니라 오디션, 예능에서까지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가 이렇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다 아내 덕분입니다.

아내가 없었으면 모두 없을 뻔한 영광이었어요.

 

투병 중

너무 힘들어 포기할까 했는데 아내가 있어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불행했던 과거와 문명 가수인 처지 때문에 원래는 결혼을 꿈꿀 수가 없었습니다.

아내는 50살이 다 되어 만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동역에서’가 떴는 데 덜컥 암에 걸린 것이죠.

결혼하자마자 아내를 힘들게 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차에, 그녀에 대한 사랑이 더욱 깊어진 계기가 있었습니다.

진성 씨가 퇴원 후 아내는 남편 몸에 좋다고 하는 약초를 캐기 위해 심마니 같은 사람들을 따라다녔어요.

그런데 어느 날 항암에 좋다는 야생 백도라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채취하기 위해 4m 정도 되는 암석 위에 있는 백도라지를 캐려다가 발을 헛디뎌 두 바퀴 굴렀다고 합니다.

평생 한 번도 제대로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그에게 어머니와 같은 희생과 헌신의 사랑을 보여준 아내를 드디어 알아차린 것이죠.

그는 이제 아내만을 바라보는 남자가 되었습니다.

한편 그의 어머니와는 결국 다시 만났는데요.

아직도 조금 어색하지만 자신을 낳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고, 자식 된 도리를 다하겠다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어릴 때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자식을 갖지는 못했습니다.

 

이런

말을 하기도 했죠.

“자신의 불행했던 유전자를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

너무 가슴 아픈 말이네요.

아직도 유년 시절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한 최근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에 나왔는데 만성적인 우울감이 있다고 오은영 박사가 진단하기도 했어요.

그렇지만 슬픈 현실 속에서도 늘 긍정적인 마인드를 잃지 않았던 진성 씨는 아들, 딸은 없지만 대신 후배들을 자식처럼 생각하며 보이지 않게 많이 도와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의 육체적인 건강 상태 또한 아직 다 나은 것은 아니라고 하네요.

완치가 안 되는 암이라고 하고,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하다고 해요.

“암은 어느 정도 나왔는데 심장이 지금도 기능이 37%밖에 안 된다며, 앞으로 가요계 생활을 얼마나 할지 모르겠지만, 명곡 다운 명곡을 남기고 싶다”

사실 그의 아내도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일 가면은 또 괜찮을까. 근데 또 아침에 저렇게 일어나서 컨디션 안 좋으면, 이제 또 하루가 또 이제 하루 종일 근심 걱정으로.. 올 때까지 그래요. 집에 올 때까지 편하지가 않아요”

 

그는

그도 이런 말을 하더군요.

“67세까지 일할 생각이에요. 건강이 나빠지면 더 일찍 끝내야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앞으로 3년 동안은 보컬 봉사활동에 전념할 생각이에요. 작은 재단이라도 만들어서 저와 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기부하고 싶습니다. ‘내가 이걸 그리는 중인데 잘 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건강상태가 이렇게 힘든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늘 웃고, 열심히 일하고, 노래하는 모습이 정말 감동적이에요.

건강 잘 챙기시고, 앞으로도 많은 분들께 위로와 용기를 주는 노래를 불러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