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뭘 그렇게 잘못한건가요…” 68세 가수 심수봉 결국 안타까운 소식이.. 몰라볼 정도로 변해버린 그녀의 현재 상황…

트로트와 발라드 그 중간의 감각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개척한 트롯 발라드의 선구자 가수 심수봉 씨.

심수봉 그녀의

노래는 아티스트 경지라는 찬사를 받고 있기도 한데요.

이런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의 인생은 너무나 외롭고 긴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자신을 강제로 정X병원에 입원시켰던 어머니와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한 어떻게 해서 결혼을 세 번이나 하게 되었을까요.

모든 내용은 방송에 나온 심수봉 씨가 직접 말한 그대로임을 밝힙니다.

 

 

지금부터

심수봉 씨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심수봉 씨는 1955년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거의 환갑이 되던 나이에 20대 처녀인 어머니를 임신하게 만들어 낳은 늦둥이였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심수봉 씨가 세 살 때쯤 아주 일찍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아버지 쪽 집안이 어마어마한데요.

4대째 내려오는 국악 명문가로 인간문화재도 몇 분 계신다고 하네요.

또한 140여 개의 음반을 낸 민속악의 바흐 집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런 가문의 피를 물려받아 그런지 심수봉 씨는 어렸을 때부터 천재적인 음악성을 보여주었다고 해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다섯 살 된 어린 수봉을 데리고 동네 의사와 재혼했습니다.

어머니는 거기서 자녀를 둘을 더 낳았어요.

그런데 그 의사가 처녀랑 새 장가를 들어버립니다.

과부였던 어머니를 시가에서 엄청 반대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어머니는 이혼 후 첫 남편의 아이인 수봉 하나만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딸 하나 잘 키우기 위해 곱고 예뻤던 어머니는 험한 행상일에 나섰어요.

어느 날 행상하는 어머니를 따라갔다가 어머니가 다방에서 문전 박대 당하는 모습을 보고, 어린 딸의 가슴에는 한이 맺혔습니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안 좋아 10대 때 희귀병 진단을 받았어요.

병명도 생소한데요.

‘뇌신경 인플레’라는 병인데 신경이 너무너무 약해 큰 소리, 비속어에 치명적이라고 합니다.

비속어를 듣고 눈에 피가 터져 실명이 될 뻔해서 수술까지 한 적도 있다고 해요.

15살 때쯤 인천 근처의 섬에 들어가 수개월간 요양을 하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그 병을 앓고 있다고 해요.

그렇게 아파서 학창 시절에는 공부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공부를 못하게 되니까 대신 음악에 더욱 빠져들었어요.

 

 

이때 여러 가지 악기를 연마하고, 혼자서 화성학을 독학합니다.

그 후 18살 때부터 돈을 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드럼을 배우게 된 계기는 어렸을 때부터 워낙 타고난 음악 재능을 보여, 엄마가 아주 멀고 먼 길을 걸어서 그 지역의 한 군데밖에 없는 피아노를 배울 수 있는 곳으로 애를 데리고 다녔어요.

그 후 드럼뿐만 아니라 색소폰까지, 거의 모든 악기를 다 배웠다고 합니다.

음악을 하면서 돈을 버느라 더욱 공부하기가 어려워 재수를 해서 대학을 들어가는데요.

 

그녀랑

어울리게 명지대 경영학 전공을 하게 됩니다.

당시 그녀는 가수가 될 생각이 없었어요.

가수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던 때라 자기는 유학을 가서 피아노를 공부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수가 됐을까요.

1975년 어느 날 학비를 벌기 위해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 부르는 알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손님으로 어마어마한 스타가 그곳에 왔어요.

바로 나훈아 씨인데요.

그녀는 센스 있게 귀한 스타에 대한 예우 차원으로 나훈아 씨의 노래를 부릅니다.

‘물레방아 도는데’ 피아노를 치는 여자가 신기하게도 트로트를 부르는데 그것도 기가 막히게 잘 부르는 거죠.

사람을 홀리는 음성으로 나훈아 씨가 깜짝 놀라 듣더니 잠시 뒤에 나갑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다시 돌아왔는데, 음반 기획사 사장 둘을 데리고 왔어요.

그리고 그녀를 강력 추천합니다.

“이런 사람이 가수를 안 하면 누가 가수하냐”라고 하면서 그렇게 계약까지 다 하게 됩니다.

그런데 좀 어이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나훈아 씨에게 스캔들이 터지자 그와 연락이 끊어진 것입니다.

 

나훈아

씨 가 빠지니까 음반 기획사 사장들의 태도가 달라지더니,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어요.

그 당시 음반을 내는 것은 집 한 채가 날아갈 정도로 돈이 많이 드는 일이어서, 음반을 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수봉 씨는 오기가 좀 생겼어요.

자기는 원래 가수에 대한 꿈이 없었는데 불씨가 확 당겨졌는데 그만 좌절된 거죠.

그녀는 자기 음반을 만들고 싶어졌어요.

당시 대학 가요제가 휩쓸던 때인데요.

 

거기에

입사하면 음반을 만들어 주겠다고 해서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때 참가한 사람들이 아주 쟁쟁한데요.

노사연 씨, 배철수 씨, 임백천 씨 등 거기서 심수봉 씨는 트로트를 불렀어요.

대학 가요제의 최초의 트롯이었다고 합니다.

청소년 여대생이 피아노를 치자 멋진 팝 스타일의 음악을 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트로트가 나오자 다들 놀랐어요.

이때 불렀던 노래가 ‘그때 그 사람’입니다.

그러나 본선 진출은 했지만 수상을 못하고 떨어졌죠.

당시는 록과 포크가 유행했던 때이고, 대학 가요제라 대학생들의 ‘순수함과 패기’ 이런 것들을 원했는데, 심수봉 씨가 부른 트로트와는 좀 안 맞았던 거죠.

노래 너무 자신 있던 심수봉 씨는 오히려 대상을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다고 해요.

수상을 못해 자존심을 구기며 상심한 심수봉 씨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수상자를

제치고 가장 먼저 음판 녹음을 한 거죠.

당시 지구레코드 사장이 심수봉 씨의 노래를 듣고 “내가 음반을 낸다면 바로 쟤다”라고 말했다고 해요.

노래는 나오자마자 미친 듯이 빵 뜹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신지 말았어야 할 분홍신처럼 그녀를 너무너무 무서운 운명으로 끌고 갑니다.

대학 가요제에 참가한 다음 해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 노래를 좋아해서 궁정동 안가에서 열린 술자리에 그녀를 불렀어요.

그리고 거기서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 거죠.

죽다 살아났지만 그 후 수많은 조사에 끌려다녔어요.

현장에 있던 것뿐이었던지라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결국 방송 금지를 당합니다.

무려 4년간 방송 금지였는데요.

그녀는 역사의 피해자였지만, 당시 신군부의 정치 때문에 방송에 나올 수가 없었어요.

 

방송은

금지되었지만 일은 할 수 있게 해주어서 밤무대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영화 ‘아낌없이 바쳤는데’의 주연으로 출연해 흥행까지 되었습니다.

이 기간에 나온 노래 1980년 ‘당신은 누구시길래’, 1983년 ‘올가을엔 사랑할 거야’도 큰 사랑을 받았는데요.

그녀는 트롯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싱어송 라이터로 그녀의 히트곡 대부분을 직접 작사, 작곡, 노래까지 하고 있어요.

뿐만 아니라 목소리가 국보급으로 깊은 한을 담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애절하면서 아름답습니다.

이런 천부적인 재능을 사랑한 대중의 힘으로 그녀는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거죠.

그러나 개인사의 비극은 10월 26일 사건이 일어났던 그날 밤부터 시작되어, 그칠 줄 모르게 됩니다.

이후의 심수봉의 이야기는 다음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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