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30년동안 참다가 이제서야… “시대의 가수 남진 결국 모든게 들통나다.. ” 갑작스런 전부인 윤복희 폭로에도 그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던 이유..

오빠 부대의 원조, 가수 남진 씨.

자타공인

1970년대 한국 가요계의 아이콘으로서 라이벌인 나훈아 씨와 함께 한 시대를 양분했던 슈퍼스타죠.

데뷔 57년 차로 70대 후반인 현재도 현역으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죠.

어마어마한 부잣집에서 태어나 별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 같은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내색하지 않았던 그의 굴곡 있는 인생과 이렇게 많은 나이에도 활동할 수 있는 숨은 비결을 알아보겠습니다.

 

 

남진 씨는

1945년 해방둥이로 항구의 도시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목포에서 제일로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었어요.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집에 자가용이 있었을 정도였습니다.

경찰관들이 자전거를 타고 순찰을 돌던 시절이었는데, 학창 시절 남진은 일본산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고 해요.

아버지가 ‘목포일보’를 만든 사장이었고, 국회의원을 지낸 김문옥 씨였는데, 정미소 사업을 크게 했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교육자 출신으로 두 분 모두 남진이 공부를 열심히 하기 바라며 가정교사까지 붙여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공부에 영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대신 예체능에 소질을 보였는데, 특히 음악은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 않았다고 해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 그는 배우를 꿈꿔서 서울로 상경해 아버지 몰래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에 입학원서를 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운명은 그를 가수로 이끌고 갑니다.

학생 때부터 팝송을 즐겨 불렀던 남진은 그 무렵 레스토랑에서 팝송을 불러 밴드 마스터에게 가수 제의를 받게 됩니다.

밴드 마스터는 당시 최고 인기 가수 남일해의 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한동훈 씨를 소개해 주었어요.

 

 

한동훈 씨는 자신의 음악 학원에 등록하고 연습생 생활을 하라고 합니다.

영화배우의 길을 꿈꿨던 그였지만, 순전히 학원에 있던 여학생이 이뻐서 등록을 하고 연습생 겸 연애를 시작했다고 해요.

1965년 드디어 첫 음반을 레코딩하게 되었죠.

 

팝송만

듣던 남진 씨는 가요를 몰랐는데, 당시 미 8군에서 이름을 날리던 가수 최희준 씨를 보고 그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고 그를 따라 합니다.

한동훈 씨가 작곡해준 데뷔곡은 부잣집 도련님 같은 그의 인상에 어울리게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팝 계열의 노래였습니다.

철저히 최희준 씨를 따라 한 창법을 구사했는데, 오히려 그게 마이너스가 된 것 같다고 하네요.

이 첫 데뷔곡이 완전 망하고 실망한 그는 낙향해버렸습니다.

그 후 다시 작곡가 한동훈 씨의 제안으로 두 번째 음반을 발표했는데 히트하려는 순간, 노래의 제목이 퇴폐적이라는 이유로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됩니다.

금지곡이 된 타이틀 곡명은 ‘연애 0번지’인데, 0번지라는 말이 이상하다고 금지곡이 되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음반도 실패하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서 술로 세월을 보냈습니다.

 

당시

4년간 병상 생활을 하느라 아들이 가수 데뷔한 것을 모르던 아버지는 어느 날 티비에 나오는 남진 씨를 보고 “당장 내려와서 공장 문지기를 하라”라고 불호령을 했습니다.

그러다 몇 달 후 돌아가신 터라 죄책감에 더욱 괴로웠습니다.

술로 나날을 보내는 그를 보다 못해 그의 어머니가 두 번째 앨범에 담긴 다른 곡인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트로트 곡을 밀면서, 이 곡으로 다시 도전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듬해인 1966년 박춘석 씨가 작곡해 준 ‘가슴 아프게’가 최고의 인기를 누리면서 그 해 MBC 신인 가수상을 수상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남진 씨는 영화배우로도 대활약하게 되며 가요계와 영화계를 넘나드는 빅스타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 후에 나온 로커빌리 스타일의 불멸의 히트곡인 ‘마음이 고아야지’는 그를 단순히 트로트 가수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가요계의 독보적인 캐릭터로 인정받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잘생긴

얼굴 그리고 ‘에비스 프레슬리’를 모방한 창법과 무대 액션에 당시에 소녀 팬들은 열광하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던 때인 1968년에 해병대에 입대했고, 이후 베트남 전에도 파병되었습니다.

남진 씨가 무릎팍도사에서 말한 바에 따르면 원래 1년간 파병 가기로 되어 있었지만, 귀국해서 베트남에서 동료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는 것은 대한 남아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여단장에게 부탁해서 2년간 파병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합니다.

수많은 동료들의 전사를 겪으면서 ‘사람은 죽으면 다 똑같다’라는 사실이 와닿았다고 합니다.

베트남에서 몇 차례 죽음의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고 해요.

이 3년간의 군 생활이 부잣집 아들로 큰 어려움 없이 살다가 근성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1971년 군 제대 후 국내에 돌아오니 자신의 음악 파트너 박춘석 씨가 라이벌 나훈아 씨와 손을 잡고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히트곡을 쏟아내는 중이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작곡가 남국인 씨를 찾아 곡을 받고 다시 정상에 반열에 서게 되는데, 그 노래가 바로 남진 씨의 최고 히트곡 중 하나인 ‘님과 함께’입니다.

 

제대 후에

더욱 폭발적인 사랑을 받게 된 그는 국내 가수 최초로 서울 시민회관에서 귀국 기념 공연을 열었고, 컴백 4개월 만에 TBC 남자 가수상과 mbc 최고 가수상에 오르죠.

언론은 그의 컴백과 더불어 당시 총망 받는 신인인 나훈아 씨와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어냈습니다.

그 후 시련이 연달아 터지기 시작합니다.

1972년 나훈아 씨가 공격당한 너무나 큰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때 남진 씨가 사건의 배후 인물로 낙인이 찍혔는데, 그런 루머가 당시엔 급속도로 퍼졌어요.

 

그러나

나중에 나훈아 씨마저 사실이 아니라는 식으로 발언을 하면서 억울한 누명을 벗긴 했지만 꽤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죠.

1976년에는 윤복희 씨와 결혼해서 큰 화제가 되었는데 얼마 가지 않아 이혼합니다.

윤복희 씨가 무릎팍도사에 나와 고백한 게 사실이라면 남진 씨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대인배죠.

당시 윤복희 씨는 유모 씨와 이미 결혼한 상태였는데, 전 남편이 두 사람의 사이를 의심하자 그녀를 짝사랑하던 남진 씨의 청혼을 받아들여 버린 것입니다.

심지어는 당시 전 남편과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결혼을 감행합니다.

나중에 윤복희 씨는 사실대로 털어놓고, 남진 씨와 6개월 만에 끝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1979년 이혼을 공식 인정하게 되죠.

윤복희 씨는 1985년 전 남편과도 정식으로 이혼합니다.

 

이런 사실을

제대로 모르고 있던 대중들은 남진 씨가 윤복희 씨를 구타하고 집에서 쫓아냈다는 등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남진 씨는 윤복희 씨에게 쏟아질 화살을 자기가 맞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해요.

그동안 그의 데뷔곡처럼 남진 씨는 ‘플레이 보이’였는데 윤복희 씨에게 호되게 당한 거죠.

그 후 미국 공연 가서 만난 재미교포 강정현 씨와 1980년 사실상 첫 번째 결혼을 하며 슬하의 1남 3녀를 낳게 됩니다.

그러나 결혼 후 1980년대에 등장한 신군부의 조직적인 탄압을 받으며 노래를 그만두려고도 했습니다.

전남의 정치인 집안 출신이지만, 본인은 정치색이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단지 친분만 있다면 여야 정치인 홍보에 다 참석하는 편이라고 해요.

 

대신 대한

가수협회 초대 협회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여기에서 정치를 했죠.

가수들의 저작권 등 권익을 위해서 앞장섰다고 해요.

1990년대에 다시 복귀해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공백기 전 최전성기에는 트로트와 로커빌리 로큰롤을 오고 가면서 다양한 장르를 소화했는데, 공백기 후에는 트로트 위주로 음악 작업을 하고 있어요.

1982년 ‘빈 잔’을 끝으로 10여 년간 공백기를 가진 후 1993년 ‘내 영혼의 히로인’, 1999년 ‘둥지’, 2008년 ‘나야 나’, 2009년 장윤정 씨와 함께한 ‘당신이 좋아’, 2014년 ‘상사화’, 2014년 ‘파트너’, 2018년 ‘남자다잉’ 등을 히트시킵니다.

그는 나이 들어서도 끊임없이 신곡을 내며 도전을 게을리하지 않았어요.

그 사이에 고비도 많았죠.

 

남진 씨는

한물간 가수로 취급받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훈아 씨보다 잘 나갔지만, 음악성에서 나훈아 씨보다 한 수 아래라는 인식이 퍼진 적도 있었습니다.

그와 나훈아 씨는 음악도 그리고 스타일도 완전히 달랐어요.

나훈아 씨가 정통 트로트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면 남진 씨는 팝과 로큰놀의 느낌이 감이 된 현대적인 느낌의 트로트입니다.

2008년 ‘나야 나’라는 곡을 발표했었는데, 2020년 ‘미스터 트롯’에서 김수찬 씨가 이 노래를 불러 제대로 역주행했습니다.

새로운 대표 곡 중 하나로 꼽힐 정도였어요.

 

이렇게

후배 가수들이 남진 씨의 곡을 불러서 역주행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남진 씨가 부르는 트로트는 뽕기가 적고, 중후하면서도 세련된 느낌이 들어 후배 가수들이 선호하는 측면도 있죠.

또 하나의 이유는 그의 인성이었습니다.

그의 매력은 다름 아닌 유쾌함.

후배 가수들을 만나면 상대가 인기가 있든 없든 ‘어이 동상 잘 지내는가’라며 먼저 손을 내민다고 해요.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주변에 따르는 사람들이 많고, 무한 칭송을 받는 이유죠.

많은 트로 프로그램에서 심사위원으로 자주 등장하는데 참가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점수도 상당히 후하게 주는 등 심사위원들 중 독보적으로 관대한 모습을 종종 보여줍니다.

최고참인 만큼 가장 깐깐할 거라는 편견을 깨는 인물, 마지막으로 그의 믿기 어려운 젊음이었습니다.

그는 흰머리가 하나도 안 보이는데 젊음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놀랍게도 그는 아직도 염색을 하지 않는다고 해요.

 

일단

유전자가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저녁에 또 운동을 하고, 나이 들어서는 수영이 해본 운동 중에서 제일 좋은 것 같다고 합니다.

때때로 골프도 즐긴다고 해요.

그리고 노래를 많이 부르는 것이 젊음의 비결인 것 같다고도 말했습니다.

호흡 운동이 저절로 된다고 해요.

 

노래를

많이 부르면 얼굴 근육을 많이 쓰기 때문에 저절로 리프팅이 된다는 것 아시죠.

그의 얼굴을 보시면 처짐이 전혀 없잖아요.

그래서 더욱 젊어 보이는 거죠.

가수 데뷔 55주년을 기념해서 수익금을 전액 기부하기도 하는 등 보이지 않게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멋지게 사는 어르신으로서 앞으로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활동해 주시기를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