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배우 이미영 씨가 오빠인 개그맨 이창훈의 근황을 공개했는데요.
맹구
봉성이 다니는 학교의 인물로 큰 인기를 끌었던 그는 1992년 KBS 코미디대상 대상을 받은 후 7년 동안 갑자기 사라진 이유를 직접 밝혔다.
이창훈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이창훈의 본명은 이봉남이다.
1955년 2월 19일에 태어난 그의 고향은 서울이다. 노원구의 서라벌고등학교와 서라벌대학교를 다녔다.

1975년 20세의 나이로 연극단체 ‘창조’로 데뷔한 그는 처음에는 개그맨이 아닌 연극계에서 활동한 인물이다.
그는 육군 특수작전사령부를 졸업하고 특전사 병사로 군 복무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
1986년 서울 연극 연출가 그룹 최우수 연기상을 받고, 최양락이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아 당시 ‘유머 1번지 한바탕 웃음’을 연출하고 있던 김웅래 pd에게 이창훈을 소개해 주었고, 김웅래 PD 또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 큰 감명을 받아 대학로 앞 커피숍에서 매일 이창훈을 만나서 “넌 티브이에 출연만 하면 반드시 스타가 될 수 있다. tv 출연만 승낙하면 주변 연극인들도 tv에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 등의 말을 하며 이창훈을 설득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이창훈은 경제적인 상황도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연극인들도 같이 출연시켜서 뜨게 해주겠다는 말에 tv 출연을 승낙하여 tv 무대에 데뷔하게 되는데요.
이때 최양락이 그 소식을 듣고 엄청 반가워하며, 곧장 이창훈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코미디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참고로 최양락은 1962년생으로 이창훈 씨보다 7살이나 어리다고 합니다.
이창훈은 1990년 3월 kbs 코미디 하이웨이 코너 ‘첫사랑 주식회사’로 데뷔를 하였고, ‘유머 1번지’의 ‘맨손의 청춘’ 코너에서 목욕탕 때밀이 ‘이달용’이라는 팔푼이 캐릭터로 출연해 “난 짜장은 정말 싫어. 난 짬뽕!”라는 유행어와 “난 죽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리바이벌은 안 해!”라는 바보 같은 유행어로 일약 스타 코미디언으로 등극합니다.
활약에 1990년 kbs 코미디 신인상까지 받게 되는데요.

1991년에는 ‘한바탕 웃음’으로의 ‘봉숭아 학당’ 코너에서 ‘이맹구’라는 캐릭터로 출연해 엄청난 인기를 얻으면서 코미디계 역사에 하나의 획을 그었습니다.
이미지 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막 나가는 표정 연기와 유연하면서도 이리저리 비틀어지는 몸을 활용한 몸 개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철저한 바보짓은 심형래의 연구조차 압도할 정도라고 하는데요.
주특기는
배트맨은 헐렁한 몸개그를 통해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양손으로 마스크를 흉내 내는 모양을 만들며 비명을 지르는 배트맨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누가 대답하고 싶어?” 학생들은 손을 들고 화답하려 했지만 망구는 “나도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큰 성공은 “나야”라고 호들갑을 떨다가 마침내 정답을 맞추게 된 것이라고 한다.
당시 초·중·고교에서 수업에 지장을 줄 정도로 많이 따라했다고 하는데, 이는 당시 얼마나 인기가 있었는지 보여준다.

그러다가 연극계 복귀를 생각하게 됐는데, 아역 팬들의 복귀 요청이 많았고, 당시 상위권에 있던 터라 주변 사람들이 말리려고 해서 결국 신인의 모습으로 안방극장에 복귀하게 됐다. 심리.
등교길에 논밭에 부딪혀 입원했다는 이유로 연극 ‘봉성아학교’에서 제외됐고, 이후 잠시 혼자 오서방에 갔다가 맹의 풍경을 안고 다시 ‘봉성아학교’로 돌아왔다. 정신을 차린 구는 돌아오는 길에 머리를 부딪혀 바보가 된다.”
당시 이 사건으로 많은 비난을 받으며 방송이 중단됐지만, 꾸준한 인기에 힘입어 1992년에는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3년
11월 8일을 끝으로 ‘봉숭아 학당’이 막을 내리고, 맹구 이창훈과 오서방 오재미는 희극인실에서 공로패를 수여하게 됩니다.
이후 그동안 ‘쩌리’었던 하회탈 남희석이 제2대 맹구적인 역할을 맡았지만, 이창훈을 따라가지 못해 결국 잊혀지고 2대 ‘봉숭아 학당’은 불명예로 종영되었다고 하네요.
이후 시간이 흐른 뒤 심현섭이 개그 콘서트에서 ‘봉숭아 학당’을 재연하면서 제3대 맹구가 되었지만, 도저히 오리지널 맹구인 이창훈 씨를 따라잡진 못했다고 합니다.
심현섭이 3대 맹구 역할을 맡게 되자, 대선배인 원조 맹구에게 전화를 걸어 ‘맹구 역할을 맡게 되었다’라고 이야기하자 담담하게 ‘해봐’라고 말하면서 많은 조언을 해줬다고 합니다.
전성기 시절 코미디상 시상식 등에서 분장을 안 한 이창훈의 모습을 보면 의외로 고전적인 미남상이었다고 하네요.
그 후 진지한 역의 배역을 맡을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다’라는 혹평을 듣게 되자, 점점 방송에서 설자리를 잃어가다가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맹구라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방송 활동을 접게 되는데요.
원래
무대 공연 즉 연극의 애착이 큰 사람이라서 전극 연기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지만, 개그 연기를 하면서 점점 자신의 색깔을 잃어가는 동시에 노모의 병이 악화되자 병간호를 하기 위해 방송 활동을 중단했다고 밝혔습니다.
대한민국에 모든 산을 쏘다니며 약초를 캐서 어머니에게 드렸다고 할 정도로 효자라고 하네요.
이후 이창훈은 ‘동작 그만’에서 하사 계급을 달고 출연했는데, 매우 멀쩡한 사람으로 나오자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갈수록 이 하사의 말투가 맹구처럼 어눌해지는 걸 볼 수 있었는데요.
그 외 어린이 드라마에 출연한 적도 있고, 다른 개그 코너 역할을 맡기도 하였지만, ‘맹구’라는 이미지가 너무 강해 시청자들이 어색해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지내다
2009년 폐암 수술을 받고 5년 만에 완치 판정을 받은 그는 암을 이겨내고 연극과 자선활동 등 평범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마지막 실제 라디오 활동은 2001년 방송된 KBS 월화드라마 ‘미나’ 출연이었는데, 20년 동안 방송에 출연하지 않은 이유는 사망 때문이라는 추측이 나왔다. 그녀는 폐암을 극복하고 연극에 출연했습니다. 그들은 사회 활동과 사회 사업 덕분에 잘 지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배우 이창훈은 망구 역 이후 진지한 영화배우, 연극배우로서의 이미지 변신을 원했다.
그러나 맹구는 멍청한 행동이 너무 강하고, 노모 간병과 암 투병으로 인해 방송에 출연하지 못해 더 이상 인기를 얻지 못했다.
이창훈이 더 이상 개그맨 활동을 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연극과 방송은 체계와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방송은 적절히 애드립도 치고 작가들과 pd들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만들고 편집해서 만들어 나가지만, 연극은 대본과 동선이 절대 어긋나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이창훈처럼 개인 역량이 크지 않은 이상 연극배우들이 방송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현재 나이는 68세인 이창훈 씨, 나중에 한 번 대학로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