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년생 왕종근 아나우서의 눈물 소식..” 부인의 갑작스러운 마비 증세 그리고 그가 아파트 경비원 취직을 생각한 눈물겨운 사연..

김성주, 전현무, 장성규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건

바로 안정적인 아나운서라는 직업을 관두고, 전쟁터와 같은 강자로 나와 성공한 케이스로 실제로 이 세 명 모두가 프리 선언 후 아나운서 시절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인기와 명성을 누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지상파 아나운서라고 하면 한때 장래 희망 1순위로 꼽힐 정도로 선망의 직업이었으나, 그러나 최근에는 종편이나 케이블 심지어 유튜브 같은 플랫폼의 시청자 선호도가 더 높아지면서, 지금도 많은 아나운서들이 더 많은 기회를 얻기 위해 퇴사라는 모험을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아나운서들의 프리 도전은 실로 엄청난 일이라 지금처럼 흔한 일이 아니었는데,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 왕종근은 무려 20년 전 모두가 부러워하는 아나운서라는 자리를 박차고 나오며, 당시 사람들로부터 ‘제정신이가. kbs가 어떤 곳인데’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거센 모랫바람이 부는 광야로 나온 인물입니다.

이처럼 오늘은 아나운서들의 프리 선언의 원조격이 되는 왕종근의 살아온 인생과 더불어 최근 출생의 비밀 혼외 자식을 실토한 뒤, 친구고 뭐고 다 끊고 아내로 인해 집안이 완전히 망해버렸다고 고백한 왕종근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1954년 제주도에서 태어난 왕종근은 흔히 사람들이 그가 부산 출신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제주도에서 태어났으며, 그런데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대구로 이주하여 유년기를 보냈기 때문에 사실상 대구 출신이나 다름없습니다.

 

한편

어린 시절 왕종근의 아버지가 공장을 크게 운영하셔서 그는 굉장히 부잣집 아들로 지냈는데, 당시에 얼마나 부자였냐 하면 어린 왕종근이 장롱과 서랍을 열어보면 그 안에는 온통 다 돈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집에 가사도우미가 갑자기 그에게 ‘지금 너희 아버지는 진짜 네 아버지가 아니야. 삼덕동에 살고 있는 삼촌이 네 아버지고, 여기는 너네 큰아버지 집이다’라고 하며 믿기 힘든 진실을 알려주게 됩니다.

그렇게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친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그날 바로 버스를 타고 평소 ‘삼촌’이라 불렀던 친아버지의 집으로 향했고, 그리고 도착한 집에서 평소 숙모라 불렀던 친어머니에게 ‘엄마’라고 하자 당시 친어머니가 ‘나는 네 엄마가 아니다’라고 말을 하면서 뒤돌아서서 흐느끼며 울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날 그의 친아버지가 어린 왕종근이 도대체 왜 큰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며 살게 되었는지 모든 진실을 알려주게 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들 왕종근이 태어났는데, 그런데 낳자마자 어머니와 왕종근 둘 모두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던 아버지가 큰 형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렇게 동생의 부탁으로 왕종근을 키우게 된 큰아버지는 그런데 키우다 보니 그만 정이 들어서 이후부터 친아버지에게 ‘더 이상 종근이 달라고 하지 마라. 내 아들로 키우겠다’라며 돌려주지 않았고, 그런데 친아버지가 생각하기에도 그 집에서 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해 가슴이 아팠지만 큰 형님의 말을 따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말을 다 듣고 보니 평소 ‘숙모’라 부르던 어머니가 자신을 왜 그렇게 예뻐했는지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다고 애원했는데, 하지만 당시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 ‘넌 그 집에서 살아야 한다’라며 다시 큰 집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난 후부터는 왕종근 그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메일을 친부모님에게 보내달라고 떼를 썼고, 그러자 큰아버지가 큰 고심 끝에 그를 보내주면서 결국 다시 친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친부모님의 곁으로 돌아왔지만, 그러나 당시 친아버지가 군인이라 그런지 늘 무뚝뚝하고 무서웠는데, 특히 이때 아버지에게 가장 서운했던 것은 그가 아나운서가 되겠다고 했을 때 ‘넌 절대 안 된다’라며 말렸던 일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나운서라는 확고한 꿈을 꿨으나 아버지가 안 된다고 했던 이유도 경상도 사람이 다 그렇듯 사투리가 너무 심했기 때문인데, 그래서 실제로 77년 대구 mbc 아나운서 시험을 봤다가 면접관으로부터 “대구 말 쓰면 아나운서 절대 안 돼”라는 말을 듣고 낙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결국 잠시 아나운서의 꿈을 접고 암담한 시절을 보내다가 그래도 백수로 살 수는 없기에 뭐라도 하기 위해서 모조 조각품을 판매하는 영업사원 일을 하게 되는데, 그런데 이때 같이 일하던 신입사원들 중에 그의 인생에 평생의 은인이자 훗날 아나운서가 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준 ‘최상훈’이라는 형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

최상훈이라는 사람은 부산에 연고가 전혀 없던 왕종근을 친동생처럼 챙겨주고, 또한 그가 아나운서를 꿈꾸는 걸 알고 늘 긍정적인 말로 격려해 주었는데, 그래서 하루는 그에게 한다는 말이 “왕 형 그만 살 거요? 계속 살 거 아닙니까? 근데 어째 시험을 그래 쉽게 포기합니까?라고 하며 다시 한 번 아나운서에 도전할 것을 응원하게 됩니다.

결국 그런 격려와 응원 덕분인지 마침내 그가 비록 지방 아나운서이긴 하지만, tbc 부산 방송국 아나운서가 되어 당시 부산 지역에서는 상당히 지명도가 있는 아나운서가 되게 됩니다.

참고로 훗날 왕종근은 ‘이때 자신을 격려해 주던 최상훈 씨가 너무 고맙고 보고 싶다’라며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 찾기도 했는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최상훈 씨는 49살의 나이에 암으로 이미 세상을 떠난 뒤라 당시 왕종근은 ‘이제 와서 찾는 내가 너무 무심하고, 미안하다’라며 오열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했습니다.

앞서 얘기한 대로 부산에서만큼은 사투리가 심했던 그도 당시 부산 시민들로부터 ‘왕종근은 서울 말 참 잘해’와 같은 평가를 받으며 인기 아나운서로 쭉 근무할 수 있었고, 그런데 운이 좋으려니까 운이 너무 좋았는지, 이런 인기에 힘입어 왕종근 그가 kbs 최초로 지방 아나운서가 서울로 발령받게 됩니다.

 

이때를

왕종근 그가 고백하길 “내가 사실 아나운서가 된 것도 실력이라기보다 하늘이 도왔고, 솔직히 ‘내가 어떻게 아나운서가 될 수 있었지’ 이런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왜냐하면 지금도 이렇게 경상도 말을 쓰지만, 원래 아나운서는 그러면 안 된다. 근데 내가 된 거다. 그리고 부산 시민들에게도 참 고마운 게 어쨌든 내가 표준어와는 분명 차이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부산 사람들한테는 표준어처럼 들렸는지 당신 알도록 경상도 사람인데도 서울말을 너무 잘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운이 좋으려니까 내가 서울로 발령을 받았는데, 원래 지방 방송국 소속 아나운서는 그 지방에서 쭉 근무하는 게 조건이다. 그런데 내가 kbs 사상 처음으로 지방 아나운서가 서울로 가게 된 경우고, 이건 kbs가 생기고 처음이라고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영광스럽게도 서울로 상경한 그는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낯설기만 한 수도권 방송국의 환경으로 인해 적응을 잘 못해서 그런지 부산과는 달리 좀처럼 방송이 잘 되지 않았고, 그래서 한 3년 동안은 친구고 뭐고 다 끊고 오로지 아나운서 일에만 집중하며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사투리로, 당시 그는 고쳐지지 않는 사투리 억양으로 인해 너무 힘들어 했으며, 그래서 하루는 택시를 타고 가는데 기사님이 참 예쁜 표준어를 쓰자 갑자기 기사님을 툭 치면서 ‘기사님 저랑 말 좀 바꿉시다. 제가 1천만 원 드릴게요’라고 하며 자신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나왔다고 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사실 말에 대한 관심이 없는 분들은 표준화를 갈망하는 지방 사람들의 설어움을 모른다. 나는 그때 너무 간절했고 정말 많이 노력했다. 그런데도 안 되더라, 그래서 결국 아나운서를 그만두기로 결심을 하고 주위 친한 분들한테 ‘저 이번 기회에 회사 그만둘까 싶습니다’라고 했더니, 그러자 모두가 하는 말이 ‘제정신인가 kbs가 어떤 곳인데. 그 좋은 직장을 왜 그만두려고 하냐’라며 다 반대하더라”

“그런데 이때 딱 한 사람이 찬성했는데, 바로 우리 집사람으로 당신 내가 아내에게 “여보 나 도저히 안 되겠다. 사투리 억양이 계속 나오는 한 내 양심상 아나운서실 본사에는 못 있겠다. 나 프리했으면 한다”라고 했더니, 그때 우리 집사람이 나에게 뭐라고 했냐면 “당신 마음 시키는 대로 하세요” 딱 그러더라, 그래서 그날부로 딱 사표 내버렸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그는 본사에서 딱 5년만 근무하고 이후 사표를 내며 프리랜서를 선언했고,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그때부터 이일 저일이 계속 들어와 아나운서 시절보다 훨씬 더 큰 수입을 벌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고백에 따르면 “프리랜서 선언 후에는 사투리 억양이 나와도 괜찮아 사투리를 편안하게 쓰면서 방송 활동을 했는데, 왜냐하면 아나운서 왕종근이 아니라 그냥 인간 왕종근을 받아준 거기 때문으로, 그래서 지금도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자부한다”라고 했습니다.

왕종근 그는 20대 후반 시절에 일반인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은 뒤 이혼을 했고, 이후 1993년 39살이라는 꽤 늦은 나이에 12살 연하의 소프라노 성악가인 지금의 아내 김미숙과 재혼하게 됩니다.

한편 앞서 얘기한 대로 왕종근의 아버지가 군인 출신의 굉장히 가부장적이라 당시 왕종근을 비롯해서 가족들 모두가 꼼짝을 못 했는데, 그런데 그의 아내가 무남독녀로 자란 데다 자기주장이 강하고 솔직한 성격이라 며느리 김미숙이 들어와서부터는 모든 게 달라지고 말았습니다.

당시 결혼 전 어른들께 소개하려고 아내를 집에 데리고 갔는데, 그런데 이때 아내가 왕종근의 부모님께 한다는 말이 “결혼 이후에도 시부모님께 할 말은 다 하고 살겠다고 선언하자, 오죽하면 당시 그의 아버지가 여자 하나 잘못 들어와서 집안이 망하게 생겼다”라는 말까지 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결혼 후에도 고분고분했던 가족들과 달리 며느리가 시아버지 말씀에 항상 제동을 걸자 하루는 화가 잔뜩 나서 “내 말 들어 나는 군인이야”라며 60 넘은 군인 출신 시아버지가 엄포를 내렸고, 그러자 이때 왕종근의 아내가 “아버님 군인 아니잖아요. 노인이잖아요”라고 하며 시아버지의 모든 말을 받아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후 그의 아버지는 아내를 보는 눈에 사랑이 전혀 없고 1년 내내 싸늘한 시선과 되게 건조한 눈으로 쳐다보게 되었고, 그러다 왕종근의 어머니마저 하루는 그에게 “야 종근아. 돈은 네가 버는데 왜 미숙이가 나한테 용돈을 주냐”라고 하며 며느리가 주는 용돈마저 못마땅해 하며 불만을 토로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때 왕종근이 정말 대처를 잘한 게, 사실 아내가 부모님께 용돈을 주는 걸 알면서도 당시 뭐라고 했냐면 “어? 미숙이가 돈 줬어요? 난 모르는데”라고 하며, 아내의 단독 행동으로 포장을 하자, 그런데 놀랍게도 딱 그날부로 모든 게 바뀌어 어마어마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시부모님들은 “우리 며느리가 말도 안 하고 우리한테 용돈을 주는구나”라고 하며 그다음부터 며느리가 말을 하면 다 예쁘게 보이기 시작했고, 이처럼 왕종근의 착한 거짓말 덕분에 마침내 집 안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 집안은 망했다’라고 외치던 그의 아버지도 이후 며느리의 진심을 아시고 제일 크게 태도가 바뀌었고, 그래서 이후 돌아가시기 전에 당시 그의 아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 “아버님 병원에서 일어나시면 제가 운전해서 아버님과 같이 서울 한 바퀴 도는 게 제 소원이에요. 그러니까 제발 꼭 일어나세요”라고 했지만 끝내 그의 아버지는 며느리의 바람을 못 들어주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때는 미움받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이후 시 부모님을 감싸주며 두 분 다 모두 기분 좋게 돌아가시게 되었고, 하지만 그랬던 아내가 정말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몸에 마비가 와 왕종근은 무려 3시간 동안이나 울면서 그의 아내를 걱정해야만 했습니다.

 

이때를

그가 고백하길 “아내라는 사람이 간섭을 많이 하고 잔소리도 많이 하면서 걸핏하면 졸혼하자고 떼쓴다. 그래서 같이 살면 피곤하다. 그래도 기댈 곳은 역시 아내뿐인데, 사실 요즘 내가 나이 드니까 매일 등이 가볍다. 효자 손은 아픈데 집사람의 손은 시원하고 쾌감도 따라온다”

“역시 아내가 고맙다. 하지만 그런 아내가 몇 년 전에는 몸에 마비가 와서 쓰러진 일이 있었다. ‘병원에 가자’라고 하니까 ‘안 간다’라고 해서 3시간 동안 울면서 안마를 해줬다. 그러자 다행히도 마비가 풀렸고, 그때야 아내가 나에게 “당신 믿고 살아도 되겠다”라고 하더라, 그런데 아내에게는 미안하지만 내가 앞으로 방송 일을 얼마나 할 수 있을지 몰라서 사실 요즘 고민의 100%가 노후 대책이다”

“그리고 만약 내가 방송 일을 그만두게 되면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고 싶은데, 그건 바로 멋있는 아파트 경비원이 되는 것이다. 주민들이 지나가면 정중하고 공손히 인사 건네는 경비가 되고 싶다. 내 친구 중에 학교 보안관을 하는 친구가 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을 하고 싶어 하고 그리고 아이들이 좋아서 정말 좋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도 몸으로 하는 경비가 꼭 한번 해보고 싶다”라고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