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는가 싶더니 결국.. “충격적으로 변해버린 그의 최근 모습…” 혼외자 알린 것도 모자라서 그의 안타까운 현재 상황을 알아보세요..

김성주, 전현무, 장성규의 공통점이 뭔지 아세요?

바로

안정적인 방송인 직장을 그만둔 후의 성공담이다.

사실 세 사람은 방송인 시절보다 훨씬 유명하고 유명하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나운서들의 무료 도전은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주인공 왕중근은 20년 전 모두가 부러워하던 아나운서 자리를 버리고 바람과 모래의 황폐한 광야로 왔다.

아나운서 자유선언의 창시자인 왕종근의 삶과 아내 때문에 가족이 망할 뻔했다고 고백한 왕종근의 고백을 함께 살펴보자.

왕중근은 1954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대구로 이주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편

어린 시절 왕종근의 아버지가 공장을 크게 운영하셔서 그는 부잣집 아들로 지냈는데요.

하루는 집의 가사도우미가 갑자기 “지금 너희 아버지는 진짜 네 아버지가 아니야. 삼덕동에 살고 있는 삼촌이 네 아버지고 여기는 너네 큰아버지 집이다”라는 믿기 힘든 진실을 알려주게 됩니다.

진실을 알게 된 그는 친부모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바로 그날 버스를 타고 평소 ‘삼촌’이라 불렀던 친아버지의 집으로 향합니다.

당시 군인이었던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아들 왕종근이 태어났는데, 낳자마자 어머니와 왕종근 둘 모두 몸이 너무 안 좋아서 혼자 감당하기 힘들었던 아버지가 큰 형님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됩니다.

결국 동생의 부탁으로 왕종근을 키우게 된 큰아버지.

그러나, 키우다 보니 그만 정이 든 탓에 친아버지에게 “종근이는 내 아들로 키우겠다”라며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친아버지가 생각하기에도 큰아버지 집에서 크는 게 더 낫겠다고 생각했고, 가슴이 아팠지만 큰 형님의 말을 따랐던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의 말을 다 듣고 보니 평소 ‘숙모’라 부르던 어머니가 자신을 왜 그렇게 예뻐했는지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지금이라도 부모님과 같이 살고 싶다고 애원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아버지가 그의 손을 잡고 ‘넌 집에서 그 살아야 한다’라며 다시 큰 집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하지만

왕종근은 그를 친부모에게 보내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고 하루도 거르지 않았고 나중에 그의 삼촌이 그를 다시 보냈고 마침내 그는 친부모의 품으로 돌아 왔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왕정근은 부모에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항상 무뚝뚝하고 무서웠는데 아마도 친아버지가 군인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가장 슬펐던 건 아나운서를 하겠다고 했을 때 “그건 안 돼.”라고 하더라.

사실 아버지는 경상도 사람들이 그렇듯 사투리가 너무 심해서 거절했다.

그래서 실제로 1977년 대구 MBC 아나운서 시험에 응시했는데 “대구에 있으면 아나운서는 절대 못 할 거다”라는 면접관의 말을 듣고 떨어졌다.

그래서 결국 아나운서의 꿈을 잠시 접고 암흑기였지만 여전히 백수 생활을 할 수 없어 모조 조각품을 파는 세일즈맨으로 취직했다. 뭔가를.

그런데 이때 함께 일하는 신입사원들 사이에서 구세주를 만났다.

당시 최상훈이라는 남자는 부산에서 인연이 없었던 왕종근을 동생처럼 챙겨주고, 자신이 아나운서를 꿈꾸는 것을 알고 항상 긍정적인 말로 격려해줬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종근에게 “종근아 그만 살래? 꼬마야 살래? 그런데 1차 시험에서 쉽게 포기했다”며 아나운서 도전을 독려했다. 다시.

결국 그런 격려와 응원 덕분인지 지역 아나운서였지만 지역 TBC 부산역 아나운서가 되었고 아주 유명한 아나운서가 되었습니다.

참고로 훗날 왕중근은 당시 자신을 격려해 준 최상훈이 너무 고마웠고 그리워 ‘사랑을 싣고 텔레비전’을 찾았지만 안타깝게도 최상훈은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49의.

당시 왕중근은 슬프게 흐느껴 울며 말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서투른 부산 사투리에도 불구하고 쭉 인기 아나운서로 활약할 수 있었고 당시 부산 시민들로부터 “왕종근이 서울이 참 좋다고 했다”는 평을 받았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왕종근은 KBS 지방 아나운서 최초로 서울로 발령받게 됩니다.

이때를 왕종근 그가 고백하길, “원래 지방 방송국 소속 아나운서는 지방에서 쭉 근무하는 게 조건이다. 내가 KBS 사상 처음으로 지방 아나운서가 서울로 가게 된 케이스라고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영광스럽게 서울로 상경한 그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낯설기만 한 수도권 방송국의 환경으로 인해 적응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한 3년 동안은 친구도 다 끊고 오로지 아나운서 일에만 집중하며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심지어 한 번은 택시 기사에게 “당신이 쓰는 서울 말투를 내 말투랑 바꿀 수 있다면 1000만 원이 아깝지 않다”라는 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결국, 아나운서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는데, 주위 친한 사람들이 “제정신이냐 KBS가 어떤 곳인데”라며 말렸다고 합니다.

당시 이에 동의한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바로 왕정근의 아내였다.

왕중근은 “여보, 못하겠어. 방언 억양이 계속되는 한 양심에 아나운서 본부를 잊지 않겠다. 자유로워지고 싶다”며 포기하고 사표를 냈다. ”

암튼 그렇게 본사에 5년만 있다가 그만두고 프리랜서를 선언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부터 일이 계속 들어와서 아나운서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사실 왕종건은 20대에 비연예인 여성과 결혼해 아들을 낳고 이혼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정근의 아버지는 군인이었고, 딸보다 아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당시 왕정근과 다른 가족들은 움직일 수 없었다.

씩씩하고 거침없는 아내 김미숙이 며느리가 된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당시

아내가 결혼 전 어른들에게 자신을 소개한 곳은 왕종근의 부모님에게 “결혼 후에도 시부모님께 다 말씀드리고 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그의 아버지는 “여자가 엉뚱한 문으로 들어가 가정이 망한다”고까지 했다.

실제로 순종적이었던 다른 유부남들과 달리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말에 계속 제동을 걸자 하루는 화를 내며 “들어봐, 나 군인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아내의 눈에 조금의 사랑도 잃어버리고 1년 내내 차갑고 메마른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종건의 어머니까지 “야 종건아 돈 벌었잖아 미숙이는 왜 나한테 용돈을 줬어?”

그러나 이때 왕중근은 그것을 정말 잘 처리했다.

실제로 왕종근은 아내가 부모님께 용돈을 준 사실을 알면서도 “미숙이가 돈을 줬다? 모르겠다”며 아내 일행으로 포장했다.

그때 시아버지와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아무 말 없이 우리에게 용돈을 주겠다”고 했다. 그녀의 입,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Wang Zhenggen의 선의의 거짓말 덕분에 가족은 마침내 평화를 맞이했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한때 “가정이 망했다”고 한탄했고, 이후 며느리의 진심을 알게 된 아버지는 자신의 태도가 가장 많이 변했다고 말했다.

나도 이렇게 미움을 받았을 때가 있었는데 그 후 시댁 식구들을 끌어안고 둘 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행복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최근 몸이 마비되었고 왕중근은 아내를 걱정하며 3시간 동안 울어야 했습니다.

이때 그는 “아내가 몇 년 전에 중풍병에 걸렸다. 병원에 가자고 했더니 거절해서 울면서 3시간 동안 안마를 했다. 아내가 미안하지만 앞으로 내가 뭘 할 수 있을지 몰라서 사실 나이먹는게 걱정이다 방송을 그만두면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다 , 근데 저거 멋있는 아파트 경비원일텐데 경비원 해보고 싶고 주민들 지나갈때 정중하게 인사해주고싶다 친구중에 학교 보안관으로 일하는 친구가 있는데 정말 좋다고 하더라 . 그래서 경비원도 해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