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게 무명시절을 이겨왔으나 결국…” 송가인 더 이상 방송 활동도 불가능한 상태… 그녀가 지난 3년간 한 방송에 나올 수 없던 이유..

1980년, 21살의 송가인의 어머니 송순단 씨는 고향 진도에서 옆 동네 앵무마을에 놀러 갔다가 28의 총각 조연환 씨와 눈이 맞아 결혼식도 없는 결혼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처럼

혼인이랍시고 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에 있던 오빠가 불의의 사고를 당해 식물인간 상태로 보름 정도 버티더니 결국은 운명했고, 심지어 이 무렵에는 첫째 아이를 출산했는데 태어나자마자 뇌막염에 걸려 안타깝게도 하늘로 떠나보내고 말았습니다.

 

 

이후부터 가슴에 묻힌 한들이 그랬는지 이른바 영적인 꿈들을 꾸며, 신병을 앓기 시작하는데 급기야 날이 갈수록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심해졌고, 그러자 당시 송가인의 친할머니가 “우리 며느리 죽는 것보다 신을 모시는 게 나으니 신 굿을 하자”라며 가족들을 설득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시 송가인의 아버지가 점쟁이 마누라와 살기 싫다며 난리를 치며 극심한 반대를 했고, 그럼에도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받던 송가인의 어머니가 남편과 영적인 신 중에서 고민을 하다가 끝내 신을 택하면서 주위 보살들의 도움을 받아 신내림 굿을 받고 결국 무속인이 되게 됩니다.

그렇게 무속인의 딸로 자고 나란 송가인은 어린 시절 무속인의 자식이란 이유만으로 친구들로부터 모진 말들을 참 많이 들어야 했는데, 그래서 하루는 어린 송가인이 학교에 다녀온 뒤 ‘친구들이 나한테 점쟁이 딸이라면서 놀린다’라며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당시 어머니가 말하기를, “가인아 엄마는 나쁜 직업이 아니야. 속옷까지 다려 입으면서 정성 들여 굿을 하고 다닌단다. 도둑질하는 것 아니니까 상처받지 말라”라며 그녀를 위로해 주기도 했습니다.

훗날 송가인의 어머니의 고백에 따르면, “당시 농사 가지곤 애들 학교는커녕 밥도 못 먹을 정도로 어려웠고, 그래서 본인이 무당이 되고 굿을 배워 어떻게든 열심히 해 가지고 우리 새끼들 먹이고 가르쳐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라고 했습니다.

아무튼 이후 중학교 시절부터 판소리를 시작한 송가인은 광주 예술고에 진학하며 본격적으로 국악인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때도 그녀의 어머니는 송가인과 둘째 오빠가 끼가 있다는 것을 알고 본인과 같은 무속인의 운명을 따라갈까 봐 늘 걱정하며 그 끼가 계속 국악 쪽으로 풀어나가길 바라게 됩니다.

그렇게 떠나가는 이몽룡을 보는 성춘향의 마음이 춘양가의 한이라는 걸 알게 될 때쯤 국악 대회에서 장관상까지 탈 정도로 촉망받는 국악인의 길을 걷던 송가인은 2010년 어느 날 엄마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되는데 “진도에서 ‘전국 노래자랑’을 하는데 꼭 나가봐”라는 전화였습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송가인 그녀는 국악 극단에 들어가 어린이 국악 뮤지컬을 하다 프리랜서로 국악 공연을 하는 등 나름 국악인으로서 꽤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뜬금없이 ‘전국노래자랑’에 나간다는 게 크게 내키지 않았고 그리고 함께 국악을 하는 친구들 보기에도 창피한 마음이 컸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의 어머니가 서울에 있는 송가인에게 날마다 전화를 해서 ‘전국노래자랑’에 반드시 나가보라며 재촉을 했고, 그러자 그녀도 ‘감 좋은 무속인 어머니가 나가라고 할 때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싶어 결국 큰 용기를 내서 ‘전국노래자랑’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처럼 어머니의 권유로 출전했는데 워낙에 노래를 잘 부르다 보니 노래가 끝났는데도 고 송해가 판소리로 몇 소절 불러달라며 노래를 요청했고, 그렇게 본선 곡 ‘정말 좋았네’를 포함해 판소리 ‘춘향가’와 ‘진도아리랑’까지 3곡을 연달아 부르며 결국 우승까지 거머쥐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그녀에게 트로트는 노래방에서 친구들과 재미 삼아 불러본 게 다였는데, 이를 계기로 그녀를 눈여겨본 ‘전국노래자랑’의 심사위원 박성훈 작곡가로부터 곡까지 받게 되어 국악인이었던 그녀가 얼떨결에 트로트 앨범까지 내게 되었고, 그런데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트로트를 자주 불러서인지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주변 사람들은 ‘국악을 하다가 갑자기 트로트를 한다고 하니 그동안 해온 게 아깝다’리며 만류를 했고, 특히 그녀에게 소리를 가르쳤던 선생님은 ‘수제자가 판소리를 그만두고 트로트 가수를 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상심이 굉장히 컸었다’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장르를 떠나서 무대에 올라 노래를 하고 싶었었던 그녀는 주변의 반대에도 과감히 트로트 가수로 변신했고, 이후부터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건 혼자만이 견뎌야 하는 도전이었으며 또한 대부분의 트로트 가수가 그렇듯 그녀 역시 서러운 무명생활의 아픔을 상당히 길게 가져야만 했습니다.

훗날 그녀를 ‘트로트의 여왕’으로 만들어줄 ‘미스 트롯’을 만나기 전까지는 무려 10년에 가까운 서러운 무명생활을 겪게 되는데, 당시 그녀는 매니저와 소속사도 없이 혼자 커다란 의상 가방을 메고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 행사장에 다녔고 그리고 겨울만 되면 차가 없다 보니 천막에서 덜덜 떨며 대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심지어

이때는 무명의 그녀가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행사를 뛰어다녀도 돌아오는 건 푼돈뿐이라 공과금과 집세, 카드 대금을 막고 나면 어느새 은행 잔고에는 바닥이 나면서 이후부터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고, 그래서 한때 직접 만든 비녀와 뒤꽂이 등 마리 장신구를 만들어 부업 삼아 인터넷에 판매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호기롭게 트로트 가수가 되었지만, 10년에 가까운 서러운 무명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또 한 번 그녀의 어머니의 촉이 발휘된 순간이 오는데, 바로 ‘미스 트롯’과의 운명적인 만남이었습니다.

이때도 그녀의 어머니가 먼저 ‘미스 트롯’의 모집 공고를 보고 느낌이 좋다며 딸에게 출연을 적극 권유했고, 하지만 당시 송가인은 명색이 현역 가수인데 일반인과 겨뤄 탈락하기라도 하면 오히려 손해가 크지 않을까 싶어 막상 본인은 선뜻 출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또 한 번 엄마의 촉을 믿고 결국 현역 가수로서 ‘미스 트롯’에 참가하게 되었고, 이후 국악을 기반으로 한 그녀의 한이 서린 깊은 소리는 단숨에 시청자들을 사로잡으며 3개월간의 고된 경연 끝에 마침내 우승자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미스 트롯’을 기점으로 그녀의 인생은 180도 바뀌어 떠오르는 ‘트로트의 여왕’이자 ‘행사의 여왕’이라 불리며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하지만 정말 안타깝게도 어느 순간부터 ‘미스 트롯’을 제작한 TV조선과 불화가 생기더니, 급기야 TV조선에서는 그녀를 전혀 볼 수 없는 큰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처음 둘의 관계가 삐걱 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우승하고 난 뒤부터였는데, 당시 송가인의 인기는 실로 엄청났었고 그렇기 때문에 TV조선은 그런 송가인의 인기를 힘입어 자사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그녀는 당시 ‘아내의 맛’, ‘뽕따러 가세’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모두 출연해 쉴 시간도 없이 방송에 출연해야 했고, 하지만 1회분 촬영에 10시간이 넘게 걸리는 일정은 그녀에게도 엄청난 피로로 다가와 결국 얼마 못 가 건강상의 문제로 송가인 측에서 먼저 제작진에게 하차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간에서는 ‘아무리 TV 조선이 송가인을 발굴했다 해도 이건 노동력 착취이자 횡포’라며 거센 비판을 했습니다.

하지만, 진짜 갈등의 주된 원인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수익 배분 문제로 송가인이 개인적으로 활동하는 모든 수익금의 25%를 TV 조선이 가져가는 구조 때문이었습니다.

즉, TV 조선의 오디션을 통해 스타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전국 각지에서 송가인이 벌여들인 행사비를 포함해 CF를 찍어 발생하는 수익 등 모든 수익의 25%는 TV조선이 챙겼고, 그렇다 보니 동종 업계에서도 이를 두고 ‘이와 같은 계약 조건은 가수에게 있어 최악의 상황이자 최악의 조건’이라며 굉장히 불합리하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처럼 TV 조선이 송가인에게 숟가락을 얹었다는 여론이 거세지자 당시 TV조선이 해명하기를, “방송 전 출연자들에게 충분히 내용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다”라며 “더 이상은 이와 관련해 대응하지 않겠다”라며 선을 긋게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3년가량을 TV조선에서 볼 수 없었던 그녀가 최근에는 ‘미스 트롯’과 ‘미스터 트롯’을 만든 서혜진 피디가 MBN으로 이적하자 어찌 된 일인지 다시 TV조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서혜진이 MBN으로 이적하자 TV조선 예능국 주요 피디들도 줄줄이 퇴사하며 서혜진이 설립한 제작사 크레아 스튜디오로 들어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송가인 그녀가 꿈에 대해 고백하길, “예전에는 정말 큰 공연장에서 공연도 하고 싶었고 더 유명해지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는데, 이제는 단 한 명의 팬만이라도 있다면 그 팬분들과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 보면서 사는 게 꿈이다. 그래서 나의 팬이라면 내 사인을 못 받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게 할 것이고, 또한 그동안 받은 사랑이 너무도 감사하고 꿈같아서 이제는 나를 채우기보다는 받은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며 매 순간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