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에게 그렇게 당하고만 살더니 결국.. “55세 김완선 결혼할 수 없는 충격적인 이유..” 오은영 박사도 그녀의 사연에 눈물을..

최근 김완선이 오은영 박사의 금쪽 상담소에 출연해 화제입니다.

알고

김완선의 이번 삶은 참 슬프고 슬프다.

그녀에 대해 알아봅시다.

올해 55세로 53세가 된 김완선 씨는 1969년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태어났다.

 

 

완선이는 다섯 자매 중 셋째 딸이다. 김완선의 외조부는 ‘학춤’과 ‘태평무’를 창작하고 편성한 현대 한국무용의 아버지로 불리는 한성준 명인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 살풀이춤을 선보인 한영숙 이모는 민속무용 챔피언이자 무형문화재로 전해진다.

김완선은 톱 댄서의 DNA를 물려받은 정말 특별한 아이다.

김완선씨의 아버지는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우리나라 고속도로와 터널 개통에 참여한 실력파 토목기사로, 경부고속도로 개통사업의 최대 공로로 꼽힌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김완선의 아버지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훈장까지 수여받게 됩니다.

 

 

이처럼 김완선의 아버지는 ‘시계’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밖에서는 근면하고 성실한 능력자였지만, 딸들에게는 그저 무뚝뚝한 아버지였다고 하죠.

가수가 되기 위해 중학교 시절 집을 나와 이모집에서 생활하게 된 김완선은 그때까지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고백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어렸을 때부터 김완선은 늘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지만 유독 춤을 출 때만큼은 신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김완선의 끼를 일찌감치 알아본 이모 한백희는 방학 때 김완선을 자기 집으로 아예 데려다가 연습을 시키기 시작했고, 김완선의 어머니가 개학 전 딸을 데리러 이모 집에 갔지만 김완선은 집에 가지 않겠다고 계속해서 엄마와 실랑이를 벌였다고 하죠.

이때가 김완선이 15살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이미 이 시기부터 김완선은 이모 한백희의 통제하에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백희는 미 8군에서 노래를 하며 앨범까지 발표했던 가수 출신으로 1978년 글래머러스한 성인 걸그룹 컨셉 ‘희자매’를 데뷔시켜 초대박을 터뜨린 장본인입니다.

 

당시

한백희는 이전에 없던 독특한 그룹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재능도 없고 노래도 부른 적 없는 인순이에게 일부러 연락하고, 인순이에게 직접 원하는지 물어봤다고 한다. 가수가 되려고.

인순이를 가수로서 처음 발견한 사람은 김완선의 이모 한백희 씨였다.

한백희는 몸매가 돋보이는 파격적인 의상과 화려한 안무로 ‘희시스터즈’를 무장했고, 한백희의 예상대로 ‘희시스터즈’에서의 그녀의 활약은 한국 가요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걸그룹 인기의 척도였던 군위문 콘서트는 ‘희자매’에게 휩쓸려 원조 군통령으로 불리게 됐다. 티켓 구하기가 어렵습니다. 1970년대 후반 ‘희자매’의 인기는 너무 뜨거워서 참석하지 못한 팬들이 난리를 피우고 난리를 피웠고, 마침내 방송이 연장돼 TV로 방송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부 ‘희자매’ 멤버들은 ‘희자매’ 수업 중 백지 수표를 받은 적도 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희자매’의 대박으로 김완선의 이모 한백희에게도 위기가 닥쳤다.

항상 ‘희자매’ 활동에 동행했던 한백희는 임신 중 딱 한 번 결석했고, 다른 매니저는 이를 틈타 ‘희자매’에게 연락해 가수들을 빼앗으려 했다.

결국 ‘희자매’에서 3년을 보낸 뒤 한백희와 함께 인순이만 남았고, 나머지 두 사람은 다른 매니저들과 함께 ‘희자매’에서 계속 활동하게 됐다.

이어 인순이는 아무 것도 아닌 자신을 발견해 스타로 만들어준 한백희에 대한 고마움으로 끝까지 한백희와 함께 있었다고 고백했다.

한백희는 단 한 번의 휴식 시간에 가수를 다른 사람에게 잃는 쓰라린 경험을 겪으며 이를 악물었다.

이어 솔로로 데뷔해 인순이에게 도전장을 내민 한백희는 ‘리듬 터치’라는 백댄서 그룹을 결성해 ‘인순이와 리듬 터치’로 활동하게 했다. 이주노, 박철우, 중학생 김완선이 있었다.

한백희는 김완선이 가수로 데뷔하려면 무대 경험이 필요하다며 경험을 쌓기 위해 일부러 김완선에게 인순이와 작업을 하도록 강요했다.

 

훗날

인순이는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해 한백희와 헤어진 배경을 설명한 적이 있는데, 한백희가 인순이에게 ‘너는 지는 해이고 완선이는 뜨는 해잖아’라고 말해서 큰 충격을 받았었다고 고백했죠.

그렇게 한백희는 김완선을 3년 동안 스파르타식으로 혹독하게 트레이닝 시킨 후 서서히 인순이에서 김완선으로 표적을 바꾸고 김완선에게 올인하게 됩니다.

김완선은 3년 동안 한백희가 만들어 놓은 연습실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발성과 노래 춤 악기 작고 일본어까지 그야말로 스타가 되기 위한 빡센 트레이닝을 받았습니다.

한백희는 연습실을 다른 댄서들에게 무료로 오픈을 하면서 대신 조건으로 김완선에게 춤 한 가지씩을 꼭 가르치게 했다고 하죠.

80년대만 해도 이런 매니지먼트 개념의 회사는 아예 전무했는데, 당시 이 한백희의 연습실에 여러 번 찾아와 김완선이 트레이닝을 받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합니다.

그렇게 수많은 이들이 김완선을 보면서 보아를 키워냈고, 지금의 SM으로 회사를 성장시키게 된 것이죠.

이처럼 김완선의 이모 한백희는 매니저계의 전설, 연예계 매니지먼트 개념을 국내에 처음 도입시킨 입시 전적의 인물로 시대를 앞서갔던 능력자인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김완선 역시 처음에 이모를 따라나섰을 때는 이모가 카리스마도 있고 똑똑하고 정말 멋진 분이셨다며 이런 이모한테서 눈 딱 감고 10년만 버티면 나중에 자기도 저렇게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다고 하죠.

한백희는 김완선을 대스타로 만들기 위해 투자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김완선의 1집 앨범 ‘오늘 밤’은 당대 최고의 펑크락 그룹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던 그룹 ‘산울림’의 베이시스트이자 천재로 불리는 산울림의 리드보컬 김창완의 동생 김창훈에게서 받은 곡입니다.

김완선의 1집 앨범은 한 곡당 수십 번을 다시 불러가며 녹음 자금만 1년을 했을 정도로 앨범의 완성도에 신경을 썼다고 하죠.

당시 국내 가요계에서는 ‘그대 이름은 바람바람바람’ 같은 서정적인 음악이 유행이던 시절이었는데, 김완선의 1집 앨범은 당시로서는 생소한 전자 드럼, 신디사이저에 하이노트 등을 이용한 전자음을 많이 가미해 실험적이면서 파격적인 음악으로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역시 다른 댄스 가수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도록 김완선은 아예 작정을 하고 무대에서 과감하게 춤을 춰다고 하죠.

한백희는 김완선의 무대 의상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명 디자이너의 의상을 받아 김완선에게 입혔죠.

그렇게 1986년 18살의 나이에 김완선이 데뷔했고, 데뷔곡 ‘오늘 밤’으로 김완선은 한국의 마돈나 섹시 디바의 아이콘이 되며 화려한 스타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당시 김완선의 눈빛 때문인지 김완선은 노출을 전혀 하지 않은 의상을 입고 무대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야하다는 이유로 MBC에서 6개월간 방송금지 처분을 당하기도 했다고 하죠.

그렇게 엄청난 센세이션으로 가요계의 돌풍을 일으킨 김완선이었지만 전문가들의 반응은 엇갈렸다고 합니다.

아직 김완선이 고등학생이었고 그저 반짝 댄스가수일 것이라는 평가가 있었던 것이죠.

 

이에

질세랑 한백희는 김완선의 2집 앨범에 더욱 공을 들입니다.

김완선의 2집 앨범은 록의 대부 신중현에게 곡을 받아 작업했고, ‘리듬 속에 그 춤을’이 바로 신중현의 곡이라고 하죠.

특히 이 곡 중간에 기타 애드립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은 신중현의 아들이자 대한민국 3대 기타리스트로 손꼽히는 신대철이 직접 애드립 부분을 연주해 더욱 화제가 되었습니다.

연이은 앨범의 성공으로 김완선은 자신이 반짝 댄스 가수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고, 3집 앨범 역시 ‘쎄시봉’의 이장희에게 받은 곡 ‘이젠 잊기로 해요’를 히트시키며 김완선은 가요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탄탄히 다져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김완선이 승승장구하면 할수록 이모 한백희의 통제는 더욱 심해져만 갔다고 합니다.

희자매의 해체 아픔을 또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던 한백희는 이모가 아니라는 유머까지 나돌 정도로 김완선을 남의 눈 신경 쓰지 않고 심하게 꾸중하며 엄격하게 관리했고 김완선이 분장실에서도 다른 동료들과 사적인 대화를 전혀 하지 못하도록 늘 통제했다고 하죠.

한백희는 김완선이 화장실을 갈 때도 쫓아다니면서 아예 김완선이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컨택을 할 수 없도록 24시간 감시했습니다.

 

심지어

김완순이 친정에 가는 것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김완순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말에 일부러 존재하지 않는 일정을 만들어 김완순과 헤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를 만날 수 없었다.

데뷔 후 한 번도 김완선과 정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한백희는 이 사실이 불쾌했을지 모르지만, 김완선을 더욱 길들여 그를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시키고 통제했다. 그녀의 통제.

김완선은 15세부터 20세쯤까지 한 번도 밖에 나가지도, 친구들을 만나지도 않았고, 창살도 없는 감옥에서 생활하며 매일 한백희와만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차 안에서 기다리는 동안 창밖의 사람들이 창밖의 세상을 바라보며 평범한 삶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너무 부러웠다고 고백했습니다.

김완선은 1990년 5집 앨범으로 가수로서 전성기를 맞이했다.

5집의 ‘The Clown Smiles at Us’, ‘My Own Thing’, ‘The Masquerade’ 등의 곡이 동시에 큰 히트를 쳤고, 5집은 100만장 이상 판매됐다.

 

여자

가수 최초로 단일 앨범 100만 장이 넘게 판매된 역사적인 기록이었다고 하니 그렇게 김완선은 가수 데뷔 5년 만에 명실공히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로 우뚝 설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한백희는 김완선을 궁녀를 넘어 아시아의 스타로 만들기 위해 더욱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1992년 김완선은 7년의 활동을 끝으로 돌연 은퇴를 선언하는데 당시에 김완선은 체력적인 한계에 부딪쳐 휴식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고 하죠.

그런데 이것 역시 홍콩 진출을 앞두고 뭔가 임팩트를 강하게 남기고 떠나자는 생각으로 한백희와 어느 신문사 기자가 짜고 벌인 가짜 은퇴 발표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