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가수 김완선의 눈물겨운 고백..” 13년간 가족들 눈치만 보면서 살더니 끝내..

당시 김완선은 은퇴 무대에 서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는데 훗날 김완선은 ‘저때 눈물을 흘렸던 건 슬퍼서가 아니라 거짓말을 해야 하니 마음이 괴로워서 눈물을 흘린 것이었다’라며 당시의 심정을 고백했죠.

그렇게 홍콩과 대만에서 약 5년간 활동을 하고 국내에 복귀한 20대 후반의 김완선에게 많은 신경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10년이 넘게 활동을 했어도 수입을 정산해 주지 않은 이모의 실체를 그제서야 알게 된 것도 있고, 15살 때부터 이모의 통제하에 있으면서 늘 억눌려지기만 했던 자유에 대한 갈망과 이제는 자아를 되찾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솟구치면서 드디어 김완선이 자기 스스로 이모와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김완선은 입고 있던 옷 그대로 이모 댁을 떠나 도망치듯 친정으로 향했다.

이어 김완선은 어차피 돈도 없었으니 가수 생활을 접으면 별로 어렵지 않을 텐데, 가수는 못 하겠으니 그냥 호떡 하나 차리고 회사를 그만둬도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모 집.

 

 

김완선은 집에 돌아온 후 ‘쇼생크탈출’을 한 자리에 다섯 번이나 봤는데 주인공의 이야기가 남의 인생이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완선은 영화가 끝날 무렵 주인공이 마침내 느낀 자유의 향기를 느끼며 동질감을 느끼고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김완선 씨 어머니는 학교를 자퇴하고 가수 활동을 하다가 10년 넘게 이모에게 혼나다가 20대 초반에 궁핍하게 집으로 돌아온 셋째 딸 김완선 씨의 처지에 안타까움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

당시 김완선의 시간은 15살 중학교 시절로 한정돼 이모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김완선 어머니는 뭘 사든 중학생들이 사주는 것만 샀다고 한다.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필통, 학용품 등을 사용하게 되어서 안타깝습니다.

내 딸이 믿었던 남동생에게 속고 속았다는 사실은 영원히 내 마음 속에 남을 것입니다.

김완선은 늘 자신의 자존심을 억누르고 통제하려던 이모에 대한 원망으로 인해 잠에서 깨어나야 할 정도로 화를 푸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이라면 리모콘을 사용해서요.

하지만 김완선이 이모에게 더욱 화를 낸 이유는 따로 있었다.

 

차라리

이모가 김완선이 벌어온 돈으로 자기가 사치라도 부리면서 그렇게 잘 먹고 잘 살았다면 오히려 덜 억울했겠지만, 이모 역시 바지 두 개와 상의 두 벌로 몇 년을 버티고 아파도 병원에도 가지 않았을 정도로 자기에게는 돈을 쓰지 않으면서 돈을 다 남편에게 갖다 바쳤다는 사실 때문에 김완선은 더욱 화가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2006년 한백희는 7년간의 당뇨 합병증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는데, 한백희는 집에 모아둔 돈은커녕 빚만 10억이 넘게 있는 상태였고, 병원비조차 빌릴 곳이 없어서 한백희는 김완선에게 연락을 했다고 하죠.

 

 

김완선은 전성기 시절 한 달 수입에 집 3채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였다고 하는데, 지금으로 환산 해 보면 1000억 원이 넘는 김완선 수입을 한백희의 남편이 다 가져다가 탕진을 한 셈입니다.

김완선은 천성이 착해서인지 자기에게 그렇게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안겨준 이모를 그래도 못 본 척할 수가 없어서 한백희의 마지막 생활비와 병원비 등을 다 김완선이 일하면서 도와줬다고 하죠.

“완선이를 한 번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다. 사랑한다고 한 번도 말하지 못한 게 가장 후회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죠.

대한민국 연예계에 굵직굵직한 신화를 남기고 1949년생 한백희는 그렇게 58세의 젊은 나이에 초라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6년 데뷔 후 20년 만에 평생 애증의 관계였던 이모가 세상을 떠나고 나니 김완선 역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완선은 2008년 하와이행을 결심하는데 당시 상황에 대해 김완선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모가 떠난 후 저와 어깨를 이어주던 인연의 끈이 투두둑 끊어지는 느낌이었어요”, “그때 전 내가 헤매고 있구나,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앞으로 나가고 싶은데 발이 묶인 것 같은 그런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와이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저와 제 인생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문제의 답을 찾았다기보다는 문제로부터 그냥 해방이 된 느낌이 들었어요. 착취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던 새가 드디어 땅에 발을 내뿜는 기분이 들었죠”라며 가수 김완선을 아무도 모르는 하와이에서 김완선은 평범하게 3년간 학교도 다니고 그림도 그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자기 자신을 회복시켜 나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김완선은 2010년 하와이에서 귀국 후 ‘무릎 팍 도사’에 출연해 그동안 자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세세히 밝혔습니다.

김완선이 이모와 활동을 하면서 13년 동안 한 번도 정산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과 24시간 감시를 당하며 통제된 환경에서 친구도 전혀 못 만나고 살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동안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내용이라 팬들은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처음으로 자신의 아픔을 방송에서 직접 고백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었던 김완선은 여전히 ​​이모와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이모의 아들인 한백희를 돌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매니저.

김완선은 이모가 자신의 자존심을 완전히 짓밟고 자신에게 큰 피해를 끼친 것에 혐오감을 느꼈지만, 이모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모른 척 할 수가 없었다. 이모가 남겨둔 가족.

김완선은 점차 이모에게서 벗어나 삶을 되찾기 시작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올해 55세가 된 김완선 씨는 10대와 20대 때 이모에게 받았던 가스등의 잔재 속에서 아직도 살아가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주변을 안타깝게 했다.

최근 김완선은 오은영 박사의 ‘황금상담소’에 출연해 조언을 받았고, 김완선은 당시 대스타였지만 자존감이 낮았다고 고백했다.

댄스홀 가수로 성공했지만, 이모의 로봇으로 살면서 이룬 것이었으며, 자신이 무엇을 이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영향 탓인지 김완선은 “내가 먼저 전화하면 민폐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나를 부담으로 여기지 않을까 싶다”고 생각했다. 무기력하고, 적극적으로 친구도 사귀지 못하고, 데이트도 하지 못한 채, 집에서 고양이와 단둘이 생활하는 데 익숙해졌다고 합니다.

김완선은 쇼핑조차 어려워하며 자동차를 살 때 카탈로그만 보고 구매한다고 한다. 늘 모든 일을 다 할 정도로 무기력하고 피로한 상태에서 생활한다고 한다.

에너지 방전 상태에 사는 김완선은 연애나 결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일하지 않는 날에는 좀 쉬어야 하는데, 데이트 한다고 화장하고 꾸미고 하는 생각만 해도 피곤해진다.

김완선은 10년 넘게 연애를 하지 않았으며, 마지막 연애 때도 사소한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 지쳐 헤어지기로 결심했고, 그 순간부터 아무 관심도 두지 않았다. 연애나 결혼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은영 박사의 말대로 김완선은 더 이상 에너지가 고갈될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에너지를 사용해야 하는 상황을 차단해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의사는 “우울증은 아니지만 너무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다 보니 만성화되고, 이것이 진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무기력한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보통의

사람은 어떤 상황에 따라서 기분이 좋았다가 울적했다가 늘 업앤다운이 있기 마련인데 김완선은 그냥 늘 기분이 다운된 상태로 그걸 자신의 성격이라고 믿으며 그렇게 지내고 있다는 것이죠.

이런 걸 전문 용어로 ‘기분 부전증’이라고 하는데, 김완선은 일단 ‘기분 부전증’ 문제부터 해결을 해야 다른 것들을 채워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오은영 박사는 김완선에게 적극적인 치료를 조언했습니다.

대부분의 ‘기분 부전증’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가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태인지조차 잘 모르고, 그렇게 늘 기분이 다운된 상태로 지내는 경우가 많다고 하죠.

 

작년에

김완선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으로 전시회를 열고 화가로 데뷔하기도 했는데 김완선은 자화상을 그리는 것 자체가 힐링의 과정이라며 자화상을 그릴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치유가 되고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위로받고 잃어버렸던 것을 보상받는 기분이 든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적극적으로 치료도 받으면서 삶의 즐거움도 되찾고 인생에 행복도 많이 누리시길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