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남진의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불과 얼마 전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신곡을 발표하며 열정적으로 활동 중이었던 남진의 인생은 수십 년간 정상의 자리를 지키며 화려해 보였지만, 이면은 너무나 충격적일 정도로 힘겨웠던 역경 자체였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의
비록 가수 생활을 거의 재개할 수 없는 등 인생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그는 거의 80세가 될 때까지 각 위기를 직접적이고 끈질기게 극복하며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다. 연령.
그는 젊었을 때 부유한 집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았다. 그는 젊었을 때 가수로 데뷔해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는 군에 입대한 뒤 베트남전에서 전사했다.
그의 복귀와 함께 언론은 당시 유망주였던 나훈아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지만, 남진은 처음 3년 동안 3연속 가수상을 수상하며 나훈아를 완전히 압도했다.
그러다가 1972년 나훈아 피습이라는 큰 사건이 발생했고, 이후 그가 나훈아 피습의 가해자로 낙인찍히면서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이후
‘라디오 스타’에서 밝혔지만 남진이 말하길, “몇십 년 지나서 신성일 선배한테 괴한이 제일 먼저 갔더라. 그다음으로, 저한테 왔다. 아침에 인기척에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모르는 얼굴이 있었다”면서 괴한이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전했죠.
당연히 남진은 이를 거부했는데요.
그러자 괴한이 “당신 라이벌을 해치면 돈을 줄 거냐”라고 말을 했다고 전했죠.
이에 남진은 “정상이 아니구나 싶었다”라고 덧붙여 좌중을 경악해 했는데요.
이어 남진은 “그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사고가 났다. 나중에 어머니가 계신 저희 목포 집에 와서 방화도 하고 그랬는데, 지금도 마음이 아픈 게 저희 할아버지 할머니 초상화가 탄 게 지금도 성질이 난다”라고 고백해 놀라움과 안타까움을 안겼죠.
남진은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적으로 탄압을 받으며 미국으로 가게 되는데, 조용필 등 후진들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거는 한참 나중 일이고 김대중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탓이 훨씬 크다고 합니다.
김대중은 학창 시절에 남진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포일보 사장상을 받았고, 외에도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남진의 부친의 덕을 많이 봤다고 하는데요.
남진의 인생은 정말 책을 써도 10권을 넘게 쓸 수 있을 정도로 파란만장하죠.
케이팝 최초의 라이벌 나훈아와 남진.
과연 당시 누구 누가 더 잘 나갔을까요?
나훈아와 남진은 1970년대부터 라이벌로 경쟁했고 두 사람의 팬덤도 갈라져 있었죠.
마침
언론 및 대중들이 두 사람을 라이벌 구도로 만들기 딱 좋은 차이점이 여럿 있었는데, 남진은 수려한 외모에 호방한 목소리로 대중성이 강했고, 나훈아는 상대적으로 투박한 외모를 가졌으나 싱어송라이터로 음악성을 어필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노래 성격 역시 남진은 도시에 세련된 이미지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한 반면, 나훈아는 고향에 대한 향수나 시골의 서정적인 분위기를 담은 가사를 주로 사용했죠.
두 사람의 집안 배경조차 대조적이었는데요.
나훈아는 부산 출신의 서민 집안이지만, 남진은 전라도 목포 출신에 매우 부유한 집안이죠.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 씨는 곡물 정미회사, 언론사 등을 경영한 기업인이자 국회의원에도 당선된 정책의 실력자였는데요.
남진의 회고에 따르면 전라남도 전체 개인 자가용이 두 대가 있었는데, 한 대는 전남도 지사를 위한 것 하나는 남진의 아버지인 김문옥 씨의 것이었죠.
두 사람의 상반된 외모 차이와 분위기 탓에 양쪽 팬덤에서도 라이벌 대립각이 만들어져서 당시 공연장에 가면 남진 팬들은 나훈아 팬들에게 ‘소 도둑놈 저리 가라’라고 외쳤고, 나훈아 팬들은 남진에게 “돼지 멷따는 소리 집어치워”라고 외치며 공방전이 벌어졌으니,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팬덤 경쟁 구조였습니다.
80년대에는 남진의 인기가 좀 더 많았지만, 이후에는 나훈아가 부각되면서 정식 라이벌 구조로 대립하게 되는데, 나훈아는 수많은 곡을 작사 작곡하면서 가수이자 예술가로서 확실한 자리를 잡게 됩니다.
물론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훈아가 남진보다 많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아니고 활동 노선의 차이도 있습니다.
남진 콘서트 티켓도 매번 매진되지만, 나훈아 콘서트 티켓은 10초도 안 되어서 동나기 때문에 콘서트 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에 가까운데, BTS, 이승환, 한국 시리즈 7차전 급으로 티켓 예매하기가 어려우며 가족이 총동원해서 예매를 해도 성공하기가 불가능에 가깝기로 유명하죠.
나훈아는 극도의 신비주의로, 신곡을 발표하는 텀도 길게 두고 신곡도 오직 콘서트에서만 들을 수 있지만, 남진은 가요프로 출연도 잦고 후배들과 자주 협업하는 등 트로트 가수 치고는 다작하는 편이니 팬 입장에서는 반드시 콘서트에 가야 할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훈아와 남진의 대립 구조는 지난해 명절 프로그램을 통해 재점화되었는데, 나훈아가 15년 만에 방송 콘서트로 안방 극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것에 비해, ‘트롯신이 떴다’에 출연한 남진의 시청률이 곤두박질 친 것인데, 동시간대에 방송했던 두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13% 대 4%로 나훈아의 압승이 되었죠.
계속 라이벌 구도가 성립되자 나훈아와 인사도 안 한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지만, 이러한 루머에 대해 남진은 ‘같이 활동한 동료인데 진짜로 그랬겠냐’라고 해명하면서 “우리는 절묘한 운명적 라이벌이다. 당시 소녀 팬들의 응원 경쟁이 치열했고 학교에서 팬들끼리 큰 싸움도 많이 했다고 하더라”라며 라이벌 구도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아가 남진은 “나훈아와의 관계는 정치계로 치면 김영삼과 김대중의 관계와 비슷하다”라고 예를 들며 “HOT와 잭스키스 싸움의 원조인 셈”이라고 덧붙였죠.
시대의 라이벌이기는 했지만, 나훈아 남진 양대 산맥 체제일 때는 남진이 더 잘 나갔고, 그 이후 공연과 콘서트에서는 나훈아가 우세하게 된 것이죠.
그런데 남진은 1976년 가수 윤복희와 결혼을 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지만, 불과 6개월 만에 이혼을 하게 됩니다.
윤복희는 남진의 사랑을 이용해 자신의 남편이 자신을 볼수록 이용한 것인데요.
고백한 사람의 순정을 이용했으니 사랑한 게 아니고 ‘이용’임이 분명하죠.
윤복희는 남진에게 미안하다며 없던 일로 하자고 한 후, 결혼 반지를 돌려주고 집도 다 가지라고 했고, 새벽 4시에 통행금지가 해제되자 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즉, 윤복희는 여전히 유주용을 사랑하고 있었고, 당시 남진을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런 사실이 알려지지 않아서 당시 남진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윤복희를 이용했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연약한 여자를 때X냐’라며 온갖 욕을 다 먹었습니다.
하지만, 남진은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비난을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윤복희가 ‘무릎팍 도사’에 나와서 위의 고백을 하자,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측근을 통해서 반응을 보입니다.
남진의 측근이 말하길, “남진 씨는 워낙 남자답고 자존감이 강한 사람이라 당시 인기 스타로서 리스크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로서 윤복희를 최대한 배려해 줘야 된다 생각하고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에 와서 말을 한다는 것은 그에게 더욱 수모를 안기는 일일 것이다”라고 말했죠.
어쨌든 남진은 남자다운 모습을 보였는데, 사건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남진과 윤복희는 처음부터 결혼한 사이가 아니라는 사실이죠.
아니
엄밀히 말하면 이들의 결혼은 법적 결혼이 아니었다.
윤복희는 “오빠 문제 때문에 한국에 왔는데, 우리 사이가 안 좋다는 말을 들은 남진이가 약혼을 하려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가져왔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반지를 받고 바로 약혼을 하게 됐어요. 이 소식은 곧바로 신문에 보도됐는데, 참 웃긴 이야기다. 이 결혼은 진짜가 아니었어요. 남편과 이혼도 안 했는데, 이게 무슨 결혼이냐”고 말했다.
윤복희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 죽음에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이때 그녀는 자신이 정말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남진에게 집 전체를 주고 주머니에 단돈 30만원만 남기고 떠났다.
즉 윤복희는 1985년까지 전 남편 유주용과 결혼했기 때문에 중개인 남진과의 결혼은 중혼으로 무효화됐다.
정말 충격적이네요.
남진도 충격을 받고 곧 미국으로 이주했을 터. 남진과 나훈아의 인기는 1970년대 후반부터 하락세를 보였고, 두 사람 모두 결혼과 이혼으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특히 조용필 등 실력파 가수들이 대거 등장했고, 남진의 경우 신군부 정권으로부터 박해를 받기도 했다.
남진은 1980년 첫 결혼을 했다. 그의 아내 강정현 씨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미국에서 살았다.
남진은 콘서트를 위해 미국으로 갔다가 오랜 친구의 소개로 아내를 처음 만났고, 아내는 솔직하고 온화한 성격으로 그를 좋아했다.
그러다가 아내와 함께 한국에 왔고, 어머니가 전라도 10대 유명한 점집에서 점을 보시고 다 괜찮다는 말을 듣고 직접 혼인신고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진은 더 이상 1970년대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지만, 두터운 팬층에 힘입어 투어와 앨범 발매, 방송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음악산업이 급격하게 발전하기 시작한 당시 1980년대는 조용필의 시대였고, 1990년대는 서태지의 시대였다.
그런데 돌연 남진의 배우자 강정현이 구속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딸 3명의 대학 입학을 위해서 강정현이 브로커를 동원했다는 혐의였는데 대학 부정 입학은 2001년 새해 벽돌을 뜨겁게 달구던 사건이었죠.
남진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래도 아내가 하는 행동에 묵인 정도는 했을 것으로 보여지는데 현재는 딸들도 시집을 잘 가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윤복희가 자신을 이용했다가 버릴 때에도 아무 말하지 않는 남자다움을 보여주었고, 베트남에서는 목숨이 달린 전투를 치르기도 하는 등 남진은 이제 때까지 가요계에 살아있는 전설이었죠.
또한, 그의 매력은 다름 아닌 유쾌함인데, 후배 가수들을 만나면 상대가 인기가 있든 없든 거의 ‘동상 잘 지냈는가?’ 하고 먼저 손을 내민다고 합니다.
그는 79세를 넘긴 나이에도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고 무한 칭송을 받고 있는데요.
어느덧 역시 팔순의 나이가 다 된 남진이 건강하게 오래 활동하기를 바라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이겨낸 가수 남진에게 응원의 말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