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 가수 남진의 안타까운 상황…” 괴한 습격 이후 은퇴 고심하나 싶더니 결국.. 끝내 봉변당한 남진의 오열 소식…

남진은 1945년에 전라남도 목포에서 태어났습니다.

남진 그의 아버지는

‘목포일보’ 발행인이자 도정 사업을 크게 운영하던 김문옥으로 전라남도 세금 납부 1위의 거부이자, 국회의원까지 지낸 야당계의 거물이었는데요.

그래서 신익희, 장면 선생 등이 호남 지역에 가면 항상 그의 집에서 머물렀으며, 김대중 또한 인사차 들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유복하지만 엄한 가정에서 늦둥이로 태어난 남진에게 집 안에서 거는 기대는 남달랐는데요.

아버지가 워낙에 완고하셨던 데다가 교육자 출신인 어머님까지 자식의 미래에 대한 모든 기준을 공부해 뒀기 때문에, 부모님은 학교 담임 선생님과 교무주임까지 가정교사로 들였지만 남진은 공부보다는 음악과 운동 등 예체능에 탁월했고, 특히 음악은 하루 종일 들어도 질리지가 않았습니다.

아버지처럼 정계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인기 배우가 되고 싶다는 소망을 가졌던 남진은 목포고를 졸업하고 상경한 뒤, 아버지 몰래 한양대 연극영화학과에 입학하는데요.

 

 

 

지금은

연예인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어 하지만, 그때만 해도 연예인은 집안 망신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남진의 아버지도 연예인은 풍각쟁이 굿쟁이라고 하셨고, 엄한 집안은 자식이 연예인이 되면 호적에서 빼기까지 했는데요.

남진이 처음부터 트로트 가수를 꿈꾼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꿈은 가수보다는 배우 쪽이었고, 즐겨 부르고 듣는 것도 트로트보다는 미 8군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이었는데요.

배우를 꿈꾸던 남진이 갑작스레 가수의 길로 접어든 건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서울로

놀러 온 목포 친구들과 우이동에 있던 나이트 클럽에 갔다가, 흥에 겨워 치기로 무대에서 노래를 한 곡 뽑은 것이 그의 운명을 바꿔놓게 됩니다.

바로 팝송 ‘your cheating heart’를 멋지게 부른 그를 밴드 마스터가 눈여겨보고 전화번호를 받아간 것인데요.

그로부터 두 달 뒤, 남진은 그 밴드 마스터로부터 정말 연락을 받게 되는데 그분의 소개로 당대 최고 작곡가였던 한동훈과 인기 가수 남일해를 만나 노래 공부를 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노래 연습실에 나가기 시작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연습생이 된 것인데, 사실 대학 1학년 한창나이 때니 이성에 관심이 더 많았던 그는 노래보다는 학원에 온 예쁜 여학생들 보려고 등록했던 것이었습니다.

이후 남진은 1년 반 동안 한동훈 음악 학원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스탠다드 팝 곡을 발표하게 되는데요.

스탠다드 팝은 50년대 미 8군 밤무대에서 활동하다 인기를 얻은 패티 김, 한명숙, 현미, 최희준 등의 가수가 부르던 장르였습니다.

당시 매일 팝송만 들었던 남진은 가요는 몰랐지만, 미 8군에서 노래하다가 가수가 된 최희준을 보고 노래의 맛을 느끼며 최희준을 모창하다가 가수의 길로 들어선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서울 플레이 보이’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그 이유는 먼저 최희준과 너무나 똑같았던 게 화근이었고 또한 남진은 녹음만 하면 가수가 되는 줄 알았지만, 소속사도 없는 신인 가수를 밀어주는 곳은 없었기 때문에 음반업계의 생리를 몰랐던 순수한 시절의 상처도 많이 받게 되는데요.

야심만만하게 데뷔했던 남진은 낙심하고 목포로 낙향했다가, 1년 후 한동훈 작곡가의 연락을 받고 계약금 5천 원에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 가수로 다시 도전을 하게 됩니다.

한동안 무명 시절을 보내야 했던 남진은 노래로 잠꼬대를 할 정도로 입이 부르트도록 연습을 했는데요.

 

 

결국 다시 음반을 취입하게 되지만 솔로 음반은 아니었고, 남진을 포함한 신인 가수 4명이 각각 세 곡씩 불러서 총 12곡의 노래가 들어간 한 개의 종합 음반을 만드는 형식이었습니다.

 

남진이

그 세 곡 중 마음에 들어 했던 곡은 ‘연애 0번지’라는 곡이었는데요.

음반이 발매되자 ‘연애 0번지’에 대한 반응은 서울 플레이보이 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노래가 대중들에게 알려지며 서서히 히트의 분위기가 무르익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 무렵 난데없이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오는데, 바로 노래가 금지곡 처분을 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곡 제목에 ‘0’자가 들어간 것이 신체의 특정 부위를 연상케 한다는 이유로 퇴폐라고 판정을 받았는데, 왜색과 퇴폐 금지곡은 대한민국에서 무조건 두 번 다시는 못 나오기 때문에 남진은 갑작스러운 소식에 무서움을 느끼며 결국 활동을 그만두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남진의 아버지는 4년이나 병원에서 투병 중이셨는데, 문밖에 못 나올 정도니까 아들이 학교만 다니는 줄 알지 가수를 하는지 전혀 몰랐던 아버지는 병원에 계시다가 TV의 아들 놈이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라 당장 아들을 호출하게 됩니다.

아버지는 남진에게’ 예끼 놈, 이 세상에 하고많은 직업 중에 할 게 없어서 풍각쟁이를 하려고 하냐’라며 ‘당장 목포로 내려가 자신의 공장 문지기나 하라’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당시

최고 인기 배우가 김승호였는데 아버지는 남진에게 ‘세상에 김승호가 몇이냐? 김승호는 단 한 명이야. 그런데 네가 김승호가 될 수 있겠느냐?’라고 혼내셨는데요.

그렇게 철석같이 대학에서 공부만 하는 아들인 줄 알았는데, 아들은 기회를 엿보다 아버지가 병환 중에 데뷔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몇 달이 지난 후 남진은 그만 또 한 번의 아픔을 겪게 되는데, 바로 아버지께서 병마를 이기지 못하시더니 그만 세상을 떠나게 되신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떠나면서도 어머니께 ‘아들이 풍각쟁이를 하면 집안 들어먹을 테니 잘 지키라’라고 당부를 하고 가셨는데요.

두 번이나 뼈아프게 실패를 하고,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도 지울 수가 없었던 남진은 이후 괴로움에 휩싸이며 툭하면 소주를 두 병씩 먹고 뻗어버리기가 일쑤였습니다.

아들이 매일 그렇게 지내니까 어머니는 ‘연애 0번지’와 함께 수록된 곡 중 ‘울려고 내가 왔나’가 좋다며 아들에게 재기를 권했는데요.

상심해 있던 남진에게 어머님은 ‘진아, 나는 판 나온 것 중에서 그 트로트 노래가 좋더라. 이 노래 한 번 해 봐’라고 하시며 용돈을 주고 가시게 됩니다.

 

그 노래는

전날 과음한 탓에 노래를 못하게 된 가수 김영광을 대신해 트로트여서 녹음 당시 내키지 않았는데도 곡수를 채우기 위해 마지못해 부른 노래였는데요.

그런데 신이 그를 도운 것일까요.

예상치 않은 곳에서 행운이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그 노래가 인기몰이를 하더니 결국 우리나라 전체에서 최고 히트곡으로 대박까지 나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우연히 택시를 탄 남진이 기사가 자신의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고 전했는데요.

그야말로 스타가 된 것이었죠.

얼마 지나지 않아 ‘울려고 내가 왔나’도 금지곡이 됐지만, 한차례 히트 이후 금지곡 지정은 남진을 더욱 성공 가도에 오르게 했습니다.

방송에서 들을 수 없으니 레코드판은 날개도 친 듯 팔렸고, 남진을 찾는 행사장은 셀 수가 없이 많아지게 되는데요.

이때부터 트로트 가수로서 남지는 우연과 실패와 성공이 엎치락뒤치락하는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울려고 내가 왔나’ 이후 그는 ‘가슴 아프게’, ‘우수’, ‘마음이 고와야지’ 등 히트곡을 연이어 만들어냈고, 발표하는 곡마다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며 탄탄대로를 달리게 되는데요.

덕분에 국내 가수 중에 처음으로 당시 최고급 승용차였던 ‘코로나’를 몰았는데, 그것은 불과 남진이 스물두 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자가용을 샀을 때 어머니는 ‘아버지가 네가 이렇게 성공할 줄 알았겠느냐’라며 불과 6개월 전에 아들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떠나신 아버지 생각에 안타까워하셨는데요.

남진은 한동안 그 차의 아버지 사진을 항상 가지고 다녔는데, 그것은 철없는 아들을 걱정하며 떠나신 아버지에게 사진으로라도 성공을 알려드리고 싶었던 아들의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던 남진에게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병역 문제였는데, 결국 그는 해병대 청룡부대에 입대 후 월남에 파병까지 자원하게 됐는데요.

 

이때 남진은

베트남에서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위험지대에서 복무하며 갑자기 날아온 포탄에 맞을 뻔했는가 하면, 위문단에 차출돼 공연을 하던 도중 한 괴한이 그의 머리에 총을 겨누기도 했고, 또다시 위문의 총격을 당했지만 옆에 있던 수통에 총알이 관통하며 겨우 목숨을 건지기도 했습니다.

남진이 파병했던 당시에 같은 해병 2여단 2대대에는 가수 진송남이 있었는데 진송남은 가수로는 선배지만 군대로는 후임이었는데요.

당시에는 군기를 잡기 위한 빠따질이 많았고, 진송남은 후에 ‘지금도 비 오는 날이면 남진 때문에 허리가 쑤신다’라고 엄살을 피웠다고 합니다.

남진은 ‘파란 많은 수십 년 음악 인생 중에 파도를 세 번 만났는데, 그것이 바로 군 복무로 인한 3년간 공백기와 결혼 후 썰물처럼 팬들이 빠져나가 외국에서 떠돌던 시절, 그리고 5공 때 비공식적 외압으로 낙향에 칩거했던 3년이었습니다.

남진은 최고 주가를 올리다가 해병대에 입대에 3년간 공백이 생기는 바람에 이제 노래를 그만두고 떠나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도 들게 되는데요.

제대 후 그는 서울 시민회관에서 재기의 리사이틀 공연을 열게 되는데, 분장실에서 매표소를 내다봤지만 공연 한 시간 반 전인데도 표를 사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침 그날 비까지 내려 남진은 순간 불안감이 엄습하며 ‘날 샜구나, 재기는 힘들겠다’까지 생각하게 되는데요.

그래도 공연은 해야 했고, 오프닝 곡이 흐르고 막이 열렸는데 그의 눈앞에 그만 꽉 들어찬 관객이 들어오게 됩니다.

우리와 같은 박수 소리와 환호성.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쫙 끼친다며 남진은 그날 평생 잊을 수 없는 무대를 가지게 되는데요.

후에 시민회관이 화재로 전소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세종문화회관이 들어섰는데, 남진은 40년 후 데뷔 45주년 기념 공연을 같은 자리에서 또 하게 되며 감개무량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그는 리사이틀의 성공으로 화려하게 재개했고 전성기가 찾아오며, 그 해부터 mbc 가수왕상을 3년 연속이나 거머쥐게 되는데요.

당시 발표된 곡이 바로 남진 인생의 최대 히트곡인 ‘님과 함께’였습니다.

하지만 님과 함께는 사실 하마터면 남진의 노래가 되지 못할 뻔했다는데요.

‘님과 함께’는 작곡가 남국인의 곡이었는데, 당시 지구레코드의 전속 가수였던 남진에게 회사에서는 ‘너한테 맞는 곡이 있으니, 한 번 오라’라고 연락을 주게 됩니다.

 

당시 남진은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고 다닐 때라서 작곡가들이 줄을 서고 기다리고 있었고, 또한 아무리 전속 작곡가가 많아도 그는 작곡과 박춘석과 가장 인간관계가 깊었는데, 그래서 남국인의 곡이 좋다는 것은 알았지만 박춘석의 곡만 받게 되다 보니 스케줄도 바빠서 가지 않게 되더라고 밝혔습니다.

당시 남진은 정말 밥을 새끼를 못 먹을 정도로 시간이 없어서 ‘한 번 간다고 가야지. 가야지’하다가 못 가버리게 되며 그렇게 반년이 지나버리게 되는데요.

결국 남국인은 그런 남진에게 화가 나게 되었고, 급기야 지구레코드의 인정수 회장까지 남국인에게 찾아가게 됩니다.

남국인이 ‘아니 남진 이놈한테 정말 잘 맞는 곡인데, 이 새끼가 오라고 해도 안 오니 나는 안 줄랍니다’라고 하자 임정수 회장은 ‘그래 뭔 곡인데. 그러느냐’라고 하며 곡을 들어봤는데, 당시 히트 제조기였던 임정수는 곡을 한 번 들어보고는 느낌이 와서 ‘스톱 알았다. 내가 연락하겠다’라고 말하고, 결국 남진에게 전화를 걸게 됩니다.

임정수 회장은 ‘야 남진아. 너 요즘 뭐 하니. 너한테 딱 맞는 곡이 있는데 이리로 와라’라고 말했는데요.

그때가 남진의 가수 인생에서 가장 바쁜 시절이었기 때문에 남진은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가보지 못했고, 이후 다시 전화해서 ‘야 이놈아 너 용돈 준다 해도 안 올래. 요즘 판도 잘나가니까 용돈 줄게 와라 그러니까’ 남진은 ‘용돈이나 받자’라는 생각에 얼른 회사로 가게 됩니다.

회사에 가서 자리에 앉은 남진에게 회장은 곡을 내놓으며 ‘너에게 맞는 곡인데 들어봐라’라고 하며 ‘회사에 피아노 치는 사람도 있으니까 한 번 들려줘봐라’해서 듣게 되었는데, 순간 남진은 딱 히트의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기는데, 남국이는 돈에 좌우되는 게 아니라 한 번 틀어지면 안 하는 사람이고, 돈을 보따리로 줘도 틀어지면 뒤도 안 돌아보는 강직한 경상도 남자라 아예 마음이 꺾여서 안 준다고 이미 선언을 해버린 뒤였습니다.

그러나 뛰어난 장사꾼이었던 임 회장은 들어보면 이 노래가 뜰지 안 뜰지 알고 있었고, 남진이 이 노래를 불러주기만 한다면 돈이 보이니 결국 남국인을 설득하게 되는데요.

 

남진을 봐서는

절대 곡을 안 주는 사람인데, 회장이 자꾸 이야기하니까 결국 남국이는 못 이기는 척 곡을 주게 됩니다.

결국 남진은 그 노래로 초대박 히트를 치며 70년대 초반부터 최고 인기 가수로 치고 나가게 되는데요.

하지만 몇 년 후 가요계는 후배 나훈아가 치고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남진과 나훈아의 라이벌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사실 정통 트로트를 고수했던 나훈아에 비해 남진의 노래는 팝에 가까웠고, 외모에다 출신지까지 각각 경상도와 전라도 음악 스타일도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으로 나뉘며 극명히 대비가 되었지만, 당시 레코드사 등 가요 관계자들이 흥행을 위해 두 가수를 그렇게 몰고 갔고, 언론도 여기에 한몫을 했는데요.

사실 나이로는 남진이 나훈아보다 두 살 많은 가요계 선배였고, 또한 남진은 성격상 활발하고 유쾌에서 누구와도 격의 없이 지내는 스타일인데 반해, 조용하고 서정적인 성격의 나훈아는 훗날 신비주의로 이미지화했기 때문에, 스타일도 전혀 다른 둘은 엄밀하게는 라이벌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나훈아가 ‘스타는 하늘의 별과 같아야 한다’라는 신비주의였다면, 남진은 ‘대중과 친숙하게 호흡해야 한다’라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는데요.

하지만 공교롭게 호남과 영남 출신이다 보니 팬들도 마치 지역 경쟁을 벌이는 쪽으로 인식하며, 그들은 70년대 가요계 쌍두마차로 가수왕 1, 2위를 다투는 사이가 되게 됩니다.

가요계에서 하늘이 만들어 준 라이벌이고, 축복의 라이벌이기 때문에 만일 서로가 없었다면 지금의 자신들도 없었을 것이라 남진은 말하고 있는데요.

 

또한 나훈아가

동년배였다면 친하게 지냈을 텐데, 선후배였던 데다 당시에는 원체 서로 바쁘다 보니 한 번 만나본 적도 없었지만, 이제는 교류하며 지내고 싶다고도 밝혔습니다.

이후 84년 2월 6일 일간 스포츠의 한 기사로 나훈아와 남진의 20년 라이벌 시대는 역사적인 막을 내리게 됩니다.

전날 오후에 신문사에는 나훈아에게서 남진하고 같이 신문사로 오겠다는 연락이 오게 되는데요.

이튿날 신문에는 나훈아와 남진의 팔씨름 포즈 사진과 함께 나훈아와 남진 20년 라이벌 청산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갔고, 나훈아의 제의로 만난 두 사람은 “그동안 치열했던 대립 관계는 가수라는 인기 직업상 서로 더 잘해보려는 발전적인 경쟁이었지 인간적인 문제는 아니었는데 이제 무대에도 같이 서면서 가깝게 지내겠다”라며 그때 두 사람이 밝힌 나이는 남진이 두 살 위지만 서로 반말로 친구처럼 편하게 지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르막 이후에는 내리막이 있듯 남진에게도 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요.

76년에 윤복희와 결혼했지만 얼마 안 가 윤복희에게 본 남편이 있는 것을 알게 되며 결별하더니, 80년대 신군부가 들어서며 남진의 아버지가 김대중의 사람이었던 것 때문에 탄압을 받기 시작해 남진은 출연 정지까지 당하며 결국 미국으로 건너가게 됩니다.

미국에서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고, 넷째가 만삭인 상황에서 귀국을 했지만 수년간의 공백기로 남진은 슬럼프가 찾아오게 되는데요.

이미 가요계가 조용필의 시대로 넘어가고 있을 무렵, 남진은 박춘석 작곡가를 4년 만에 다시 만나 ‘빈잔’이라는 노래를 받게 되었고, 다시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시대가 바뀌어 여러 가수들이 등장하며 예전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고, 게다가 또 한 번의 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 바로 한 호텔 카바레에서 노래를 부르고 나와서 주차장에서 자신의 차 문을 여는 순간 갑자기 뒤쪽에서 나타난 20대 남성 3명으로부터 흉기로 허벅지를 찔리는 바람에 전치 3주의 중상을 입고 순천향병원으로 실려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남진은 건강이 나빠지며 ‘가수를 그만두고 떠날지’ 고민할 정도로까지 몸이 많이 안 좋아지게 되는데요.

그때 그는 당시 무명이었던 차태일이라는 작곡가를 아주 우연하게 만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둥지’라는 후에 대박을 치게 된 노래 한 곡을 받게 됩니다.

 

당시 남진은

남들의 만류에도 그 노래를 끝까지 밀고 나갔는데, 방송국 피디도 성공할 줄 몰랐던 이 노래는 결국 대박이 나며 또 한 번 남진의 전성시대를 열게 되는데요.

남진에 대해 잘 모르던 젊은이들에게까지 노래가 사랑을 받으며 남진은 다시 위기를 극복해내게 되는데, 60년대 외색가요 시비 금지곡 처분을 받고 80년대 군사정권 탄압으로 방송 정지를 당하는 등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오래도록 사랑받는 국민 가수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남진의 비결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에 대해 남진은 다 하늘이 만들어준 것이라며 겸손하게 말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노력은 기본이라고 덧붙이며 노력은 자신의 몫이고 그 이상의 결과는 모두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세 번의 슬럼프가 있었지만, 매번 팬들이 잊지 않고 뜨거운 사랑을 주셔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고, 슬럼프를 통해서 다시 노력하고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됐기 때문에 다시 한번 팬들께 감사하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또한 그의 매력은 다름 아닌 유쾌함인데, 후배 가수들을 만나면 상대가 인기가 있든 없든 ‘어이 동상 잘 지냈는가’ 하고 먼저 손을 내밀기 때문에, 그는 고비를 넘긴 나이에도 주변에 따르는 지기가 많고 무한 칭송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의 숱한 히트곡을 만든 작곡가 박춘석이 팔순의 나이로 별세한 가운데 어느덧 역시 팔순의 나이가 다 된 남진이 못 쪼록 오래도록 건강히 활동하기를 바라며 너무나 많은 위기를 극복하며 살아온 가수 남진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