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설에 이혼설까지… “끝내 모든 방송 하차 결정..” 그녀가 공개한 아이를 낳지 않은 충격적인 이유 한 가지.. 도대체 뭐길래..

그녀에게는 늘 따뜻함이 베어 있습니다.

어릴 적 정은아는

고향 동네에 이웃집 언니 같기도 하고, 학창 시절 단아한 국어 선생님 같기도 한 정은아 아나운서.

제로 만나보면 키는 172cm에 달하고, 나이에 비해 상당히 젊어 보여 ‘아나운서계 최고의 몸매’라는 수식어에 고개가 끄덕여진다고 하죠.

이제 나이가 어느 정도 들다 보니 단아하면서 안정적인 진행이 돋보이는 정은아 아나운서이지만 한순간 프로그램에서 강제 하차를 당하며 설움을 맛봐야 했다고 하는데요.

 

 

 

그리고

그녀는 이른 나이에 결혼했음에도 아이가 없습니다.

도대체 그녀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정은아는 한국외대에 다니며 기자가 되는 꿈을 꾸다가 아나운서로 전향을 하게 되는데요.

사실 방송 아나운서가 될 생각은 별로 없었고, 기자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하죠.

그러다가 우연히 시험을 보러 갔다가 카메라 테스트까지 받았는데, 심사위원들이 자신을 모니터로 보고 있는 그 순간이 굉장히 짜릿했다고 합니다.

그 짜릿함 덕분에 허리를 오히려 더 꼿꼿하게 펴며 앉았고, 그때부터 매력에 빠졌다고 하는데요.

삼수 끝에 1990년 1월 1일이 아나운서가 된 정은아는 4월에 ‘생방송 전국은 지금’을 시작하죠.

들어온 지 몇 달 안된 햇병아리 아나운서가 kbs의 간판 프로그램 아나운서로 내정되자, 아나운서실에서는 반대했는데 제작진이 원했다고 합니다.

당시 ‘정은아가 누구 집 딸이다’ 하는 소문까지 났었고, ‘아버지가 어디 국가기관에 근무한다’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하는데요.

정은아의 아버지는 정말 평범한 집안의 가장이었는데 말이죠.

생방송이고 중요한 프로그램이라 신입은 안 된다고 반대하는 줄도 모르고 룰루랄라 간 다음 ‘안녕하세요. 정은아입니다!’라고 했는데 어쨌든 그렇게 생방송을 처음 시작했고 칭찬을 받았다고 합니다.

 

2년간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진 게 큰 경험이자, 준비 기간이었던 것 같다고 하는데요.

제작진 입장에서는 ‘이렇게 여러 번 떨어지고, 겨우 붙은 아이인데 뭐라도 할 거다’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하죠.

정은아는 중학교 때부터 방송반으로 활동한 게 아나운서가 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요.

중학교 때 정은아 때문에 방송반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국어시간에 시를 읽어보라고 하기에 아무 생각 없이 읽었는데 시는 저렇게 읽는 거라고 말씀하셨죠.

그리고 국어 선생님이 다음 학기에 방송반을 만드셨는데, 정은아가 당시 중학교 방송반의 첫 번째 아나운서였다고 합니다.

그녀가 30년간 방송에 매진할 수 있었던 건 남편의 몫이 8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죠.

대학 시절 신입생과 복학생의 만남으로 처음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198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남편이 반년 동안 정은아를 지켜보다가, 그해 8월 개강하는 날 ‘시간이 있냐’라고 물어보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는데요.

삼수 끝에 kbs에 입사했는데 아나운서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다시 원서를 가져다준 사람도 남편이고, 그동안 정은아가 한 방송은 물론이고, 신입 때 라디오에 10초 안내 멘트 나가는 것까지 다 녹음해뒀을 정도로 방송인 정은아의 성장 과정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라고 하죠.

남편과의 사이에 정은아 아나운서는 아이가 없는데 불임이 아니냐는 말들도 있는데요.

결혼 초에는 아나운서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 자녀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나중으로 잠시 미루었는데요.

물론 나중에는 아이를 갖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제는 순리대로 살기로 마음을 바꾸었다고 하죠.

이런 말을 종합해 보면 시간이 지나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아 현재는 순리대로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한 아나운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정은아 아나운서는 기술적인 노력, 본능적인 애정 그리고 어머니의 칭찬에서 얻은 자신감이라고 답했는데요.

 

정은아는

1997년 3월 손범수와 함께 퇴사 후 프리랜서로 전향하여 KBS에서 ‘함께하는 저녁길, 정은아입니다’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해고되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편안하고 친근감 있는 진행으로 인기가 높았던 정은아 아나운서는 2017년 KBS 직원들이 방송 공영화를 외치며 정상적인 언론사의 역할을 하고자, 총파업에 들어가자 생방송 불참 의사를 전달하죠.

정은아는 ‘후배들이 결의를 해서 그렇게 파업을 하는 상황에서 빈 책상을 보며 들어가 일하는 게 마음이 힘들다고 생각했다면서, 파업 중인 후배들이 힘내시고 잘 되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당초 오영실은 정은아의 대타로 진행을 할 예정이었지만, 정은아의 파업 지지 선언 후 보복 교체로 자신의 이름을 건 프로그램을 진행해 눈살을 찌푸리게 했는데요.

오영실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함께 하는 저녁길 오영실입니다’로 프로그램명이 바뀌었다는 점에서 정은아가 돌아갈 길은 완전히 사라지고 맙니다.

 

 

정은아는

당초 파업 지지 의사를 밝히며 파업이 끝날 때 돌아오겠다는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힌 상황이었다는 점에서 황당함은 더 컸죠.

정은아 아나운서가 국민들의 박수를 받은 그 순간에 이미 본인도 모르게 해고자가 되어 있었으며, kbs pd들은 “작년 조직 개편 이후 새 프로그램이 통과되기까지 최소한 몇 주의 시간이 걸린다는 기본적인 관념을 갖고 있었는데, ‘함께하는 저녁길 오영실입니다’라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당일에 바로 통과되는 기적과 같은 장면을 이번에 처음으로 목격했다’라며 프로그램이 신설된 이유 또한 석연치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담당 피디와 해당 채널 피디들, 라디오 사업부 직원들 중 누구도 ‘며칠 동안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라고 주장하며 황당해 했는데요.

즉, kbs 경영진들이 일방적으로 강제 인사나 프로그램을 폐지할 수 없는 제도가 마련돼 있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죠.

더욱 황당한 건 오영실의 앞뒤 안 맞는 행동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오영실은 자신이 출연한 tv조선 인생 다큐 ‘마이웨이’에서 말하길 “KBS 근무 당시 나이 들면서 중견 아나운서들 10명이 단체로 지방 발령이 났다. 묵시적인 권고사직이었던 것”이라며 “제가 그때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라고 전한 바이기에 자신의 행동과 배치돼 더 황당함을 갖게 했죠.

배우로 전향한 이유를 설명하며 한 말이지만, 부당하다고 생각했던 인사를 당했을 정도면 또 누군가의 부당한 인사에 분노를 해야 하는데, 얼씨구나 자신의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채우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에 앞뒤가 맞지 않았는데요.

 

애초

대타 mc로 들어간 건 비판받을 이유가 전혀 없지만, 프로그램 이름을 바꾸고 자신이 공식 mc로 출연한다는 것은 비난받아도 할 말이 없었죠.

정은아의 이런 생각을 보면서 참 이미지처럼 바르고, 자신의 역할과 현재의 일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모습이 참 존경스럽다는 생각도 들었는데요.

정은아 씨의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비판보다는 칭찬을 해준 어머니 밑에서 잘한 덕분에 많은 사람들 앞에 설 때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하는데요.

“큰 애는 얼굴은 안 예뻐도 공부를 제법 하고요. 둘째는 음악에 재능이 있고 목소리가 고아요. 막둥이는 키는 작아도 글씨를 얼마나 잘 쓰는지 몰라요”

어머니는 손님이 오시면 첫째인 정은아와 삼 형제를 불러놓고 꼭 이렇게 칭찬을 해주셨다고 하죠.

그런데 정은아는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이 칭찬이 막내에 대한 특별한 배려였다는 것을 아주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하는데요.

몸이 약했던 막내는 키도 작고 학과 공부도 잘 따라가지 못했고, 매사 적극적이고 활발한 언니와 오빠한테 밀려 주눅이 들까 봐 어머니는 항상 같은 가치로 막내를 앞세웠죠.

그런 어머니의 교육 덕분에 몸이 약했던 막내도 자신감을 갖고 무엇이든 열심히 했는데요.

어머니는 ‘착하고 우묵 조묵 예쁘고 마음이 넓어 이해심도 많고 글씨를 잘 쓰는 우리 막내’라고 항상 칭찬해 주셨는데, 정은아가 받은 우등상장과 남동생이 음악 콩쿠르에서 받은 상장 옆에는 막내가 쓴 가운이 걸려 있었다고 하죠.

‘쉬지도 말고 달리지도 말자’

 

어린 정은아에게는

알 듯도 모를 듯도 하던 집안의 가훈이 쓰인 액자는 동생의 큰 자랑이기도 했는데요.

글씨를 잘 쓰는 것과 공부 잘하는 것이 집에선 항상 똑같이 칭찬을 받았죠.

“연필을 예쁘게 깎았구나, 동생을 잘 돌보았구나” 어린 시절 받았던 어머니의 이런 칭찬은 더할 수 없는 양분이 되었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정은아에게 맏이로서 “네 의견은 어떠니?”를 물어보셨는데, 그래서 학교에서도 선생님께 궁금한 게 있으면 당연히 여쭤보고,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히 제시하는 줄 알았다고 하죠.

그래서인지 초등학교 통지표를 받아보면 “합리적인 사고를 갖고 있으나, 매우 비판적임” 이런 게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비판적인 게 뭐지라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어떤 선생님들은 그게 불편했을 수도 있겠다 싶지만,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어른들하고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고 하죠.

 

정은아 아나운서는

이금희 씨와는 멀리 있지만 서로 응원하는 사이라고 하는데요.

이금희 씨가 한 살 어리지만 오래전에 같이 시험 봤다가 떨어진 인연도 있고, 시작부터 수월치 않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서로 응원하는 마음이 있다고 하죠.

근데 인연이라는 게 방송사 안의 인연이기 때문에, 동기라고 해서 나오면 자주 만나지는 않았는데, 가끔 사적으로 보는 건 원종배 아나운서나 김병찬 아나운서 정도라고 합니다.

취임 이후 시작한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인데요.

30여 년을 mc로서, 아나운서로서 정상의 자리에서 늘 단아한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치열한 자기 관리가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정은아 아나운서는 특별한 운동을 찾아서 하지는 않지만 가끔씩 도보나 달리기를 하는데, 속도감은 없지만 지구력이 강한 편이라 오랫동안 끈기 있게 하는 편이라고 합니다.

무엇보다

일정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건강 비결이라고 했는데요.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그 외의 시간에는 스케줄을 잡지 않고, 11시가 되면 잠을 자야 하는데 일주일에 이틀은 쉰다고 합니다.

술도 안 하고, 잘 자고, 잘 먹고 그게 건강 비결이라고 하는데요.

그녀는 보는 이로 하여금 편안하고 기분 좋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브라운관을 통해 그녀를 만난 지 30여 년이 훌쩍 지났건만 늘 사람 냄새나는 방송인으로 겸손하고 친근한 모습은 변함이 없죠.

정은아 아나운서가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길 바라며 대중들에게 편안한 진행으로 오랫동안 방송 활동을 해줄 수 있기를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