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다 못해서 탈출한거다….” 배우 이효춘이 아직까지도 결혼을 후회하는 충격적인 이유 단 한가지.. 안타까운 인생사..

이효춘은 우리나라의 6.25가 터졌던 1950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렸을 때 아버지가 광주여고 교장까지 하셨기 때문에 어려움도 모르고 공주처럼 자랐습니다.

여성이 고등학교에 다니는 일이 드물던 시절, 이효춘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춤을 췄고, 건강한 치아로 미인상을 받을 정도로 남다른 미모로 인근 남학교 학생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

이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부에 재학 중 미스 중앙대학교에 당선될 정도로 남다른 미모를 뽐냈고, 스무 살쯤 되자 자신이 예쁘다고 쳐다보게 됐다고 한다. 몇 시간 동안 거울.

 

이후

중앙대 대학원까지 진학했던 이효춘은 1970년 tbc 공채 탤런트로 연기자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녀는 당시 특유의 청초하고 여성미 넘치는 얼굴로 한혜숙, 김자옥, 김영애와 함께 70년대 멜로 드라마의 단골 여주인공으로 활약하게 되는데요.

이효춘은 데뷔 3년 만에 드라마 ‘파도’로 첫 주연을 맡았는데, 당시 학사 출신 고학력자로 파격 캐스팅을 하며 이슈가 되기도 했었고, 이 드라마로 대중들에게 자신을 알리며 한국일보 신인상과 여우주연상까지 수상하게 됩니다.

 

 

이후 78년에는 드라마 ‘청춘의 덫’에서 여주인공 서윤희 역으로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최정상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는데요.

당시 드라마의 상대 배우가 이정길이었는데 훗날 이효춘은 이정길과 연인 연기를 제일 많이 했다며, 이정길과 연인이 아니라도 같은 작품을 한 적도 15번 정도나 되는데 한 번은 이정길이 자신에게 수영장을 가자며 데이트 신청을 한 적도 있다고 고백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당시

이효춘은 남자 앞에서 수영복을 어떻게 입을까 고민해 요청을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정길은 포기하지 않고 이효춘에게 다시 영화관에 가자고 했고, 당시를 돌아보면 그때 데이트 초대를 받아들였더라면 지금 결혼했을지도 모른다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큰 인기를 끌며 주연배우로 활동했던 이효춘은 1983년 돌연 결혼했다.

당시 노처녀들은 20대라고 불렸는데, 여자들은 30세가 넘고 압박감에 시달렸기 때문에 친구를 만나 급하게 결혼을 결심했고, 남편은 깔끔한 외모에 부유한 집안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이효춘의 결혼생활은 시작부터 수많은 난관에 부딪힌다.

시아버지 집에서 시작된 신혼생활 중, 미국에 살던 처제가 갑자기 임신을 하여 한국으로 오게 되었는데, 남편을 통해 시어머니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 신혼집에서 형수, 그 남편과 함께 살아야 한다는 법.

 

당시

자신도 임신한 상태였지만, 새댁이라 감히 시어머니께 반대를 할 수 없었고 결국 두 쌍이 한 집에 같이 살기 시작하게 되는데요.

시누이 부부와의 한 지붕 두 가족생활은 요즘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보수적인 한국 문화 사회에서 이효춘이 결혼하던 시대는 시어머니 말이 곧 법이었기에,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시누이 부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효춘의 시어머니는 보통의 시어머니와는 조금 다른 스타일의 분이라서, 일반적인 시어머니들처럼 ‘뭐 해와라’라든지 ‘왜 시댁에 전화 안 하니’라고 하는 분이었으면 차라리 이효춘도 더 편하고 재밌게 알콩달콩 살았을 텐데, 그렇지 않고 시어머니는 말씀도 잘 안 하시고 거의 웃지 않는 성격의 사람이라 이효춘도 시어머니가 웃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고, 소리 내서 웃는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그녀의 시어머니는 조선시대의 대왕대비마마 같았던 분이셨던 것인데요.

뿐만 아니라 이효춘의 시누이도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말수도 없고 잘 웃지 않았다며 두 사람이 카리스마가 있으니까 그 앞에서 이효춘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 모으고 고개 다소곳이 숙이고 공손한 자세로 있어야만 했다고 합니다.

 

훗날

이효춘은 당시를 회상하며 “조선시대 무술을 연마하거나 복무하는 시녀처럼 행동했고, 시어머니 방을 나갈 때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늘 지켜줬다”고 말했다. 머리를 숙이고 있어.”

또한 “다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면 형수님이 한 시간 동안 누워서 식사를 하셨는데, 형님이 그렇게 먹어서 내가 먼저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거기 있으면 죽을 것 같았어요. 다음날 그녀는 항상 큰 전채 요리를 준비하여 방으로 가져왔습니다. 제가 드렸는데 형수님이 그때도 한 시간은 먹었다고 하더군요.

 

 

더욱이 한 집에 두 아이가 누워 있었는데, 시어머니는 이효춘의 딸은 돌보지 않고 딸의 아이만 돌봤다고 한다.

게다가 이효춘의 남편은 전형적인 부잣집 아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직업도 없이 바보처럼 살았다. 심지어 친한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놀아주기도 했고, 이효춘은 남편에게 이 사람을 믿고 살 수 있겠느냐며 크게 실망했다.

 

더구나 그녀는 임신 이후에도 팬 사인회를 다니며 스케줄을 소화했는데, 아이가 거꾸로 있어서 수술을 해야 해서 자신은 병원에서 힘겹게 누워 있는데 남편은 만화책을 가방 한가득 가져와 무심하게 만화책만 보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효춘은 힘겹게 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그녀와 혼인 신고도 해주지 않아서 결국 딸을 남동생 호적에 입적하게 되는데, 그렇게 남편에게 신뢰감이 떨어진 이효은 결국 이혼까지 결심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이혼을 하면 큰 죄를 지은 것 같은 사회 분위기였음에도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길래, 교장까지 했던 친정아버지까지도 사회적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효춘에게 이혼을 하라고 종용을 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시댁에서 견디고 견디다 도저히 견디지 못해 탈출하듯 떠나며 이혼했다는 이효은 이혼녀라고 손가락질 받기 싫어 몇 년 동안 친한 동료들도 안 만나고 혼자 가슴 아리를 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빈자리를 만들어준 것 같아 아이를 안고 펑펑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하는데요.

그렇게 이혼 사실을 꽁꽁 숨기던 이효춘은 다시 활동하며 차를 바꾸게 되었는데, 자동차 딜러였던 친한 동료 남편에게 차를 사게 되어 차량 구입에 필요한 이런저런 서류를 냈는데, 결혼한 지 몇 년 됐는데도 이효춘이 처녀로 돼 있는 걸 이상하게 생각한 그 딜러가 집에 가서 와이프에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고, 와이프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결국 소문을 접한 기자들이 어느 날 방송국으로 몰려들었고, 이효춘은 어쩔 수 없이 이혼 사실을 실토하게 되는데요.

이튿날 연예잡지에 이혼 사실이 실리자 이효춘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괴로운 심정을 데뷔 때부터 제일 자신을 예뻐했던 한 남자 감독에게 털어놓게 되는데요.

 

이효춘은

처음으로 이야기를 털어놓고 펑펑 몇 시간을 눈이 붓도록 울었는데, 자신을 그렇게 아껴주던 그 감독은 이후 그녀에게 갑자기 180도로 냉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감독은 이후 이효춘에게 아무것도 아닌 일로 트집을 잡고 혼을 내기 시작했는데요.

야외 촬영을 가면 자리 조금 벗어났다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을 내는데, 현장에는 구경꾼들도 있어서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고, 그렇게 예뻐해서 하트를 뿅뿅하던 사람이 180도 돌변을 하더니 몇 년을 그렇게 냉담하게 이효춘을 대했다고 합니다.

배우라는 직업 자체가 딴따라라고 천대받는데 이혼까지 하면서 혼자 딸을 키우게 되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는 이효춘.

 

그녀의

딸 역시 자신이 이효춘의 딸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싫어했고, 엄마에게 서운함까지 느꼈다고 한다.

시간이 흘러 중년배우로 다시 활동한 이효춘은 슬픈 여자로 이미지 변신을 위해 코믹 연기에 주저하지 않고 도전했지만, 너무 의욕이 넘치고 연기도 과했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댓글에 그녀는 부정적인 댓글 때문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대장에 비암성 폴립 3개가 있다는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았는데, 아버지는 대장암, 어머니는 신장에 문제가 있어 3년간 투석을 병행해 건강에 대한 우려가 컸다.

이효춘은 어린 시절 큰 인기와 활약을 펼쳤지만,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평생을 혼자 살게 됐다.

TV에서 결혼하는 모습, 참깨 뿌리는 걸 싫어할 정도로 평생 싱글이어야 한다고 밝힌 배우 이효춘에게 시청자 여러분의 따뜻한 위로와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