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일생 부른 41년생 가수 이미자 결국..” 힘든 가족사에 그녀가 최근 공개한 안타까운 근황에 모두가 오열한 이유..

이미자는 1941년에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서 태어났습니다.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난 그녀는 첫 돌 무렵에 그만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는데요.

이어서 할아버지까지도 중풍으로 쓰러지자, 당시 집안 어른들은 그런 집안의 불행을 며느리의 드센 사주 탓으로 돌리는 바람에 이미자는 어머니 등에 엎혀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강릉으로 떠나게 됩니다.

시댁에서 축출당한 어머니를 따라 외할머니 댁에서 생활고를 겪으며 살아야만 했던 이미자는 이후 어머니가 강릉에서 다른 남자와 재혼하는 바람에 어머니로부터 반강제로 버려지게 되면서, 네 살 때 다시 친가로 옮겨와 병약한 아버지와 나이든 할머니 밑에서 엄마 얼굴을 잊고 살아가게 되는데요.

친가에서는 아버지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올 때면 탁주 한사발에 흥이나 젓가락 장단에 맞춰 유행가를 부르곤 하셨는데, 겨우 서너 살 꼬마였던 이미자는 옆에서 그걸 구경하다가 아버지 친구들이 돌아가시면 그 노래들을 기억하고 따라 부르곤 했습니다.

 

당시

이미자는 머리가 뛰어난 꼬마였는지 구성진 가락은 물론 ‘사랑이 괴로워서 나는 울었네’ 같은 가사까지 징그럽게 그대로 따라 불렀는데요.

꼬마 아이가 그러니까 그걸 보고 신기했던 친지들은 모이기만 하면 이미자에게 노래를 해보라고 시켰고, 7살 때는 동네 노래대회까지 나가 특별상을 받고 상금으로 쌀을 사서 모처럼 식구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등 이미자는 어릴 적부터 동네나 학교 콩쿠르에 출전해 밥솥과 냄비 등의 상품을 잔뜩 타오게 됩니다.

 

 

어릴 적 지금의 한남동 유엔빌리지 쪽에 살았던 그녀는 10살 때 그만 6.25가 터지면서 한강 다리가 끊겼지만, 1.4 후퇴 때 한강이 얼자 살기 위해 얼음을 건너며 피난을 떠나게 되는데요.

충남 예산의 한 초등학교에서 겨울을 나던 이미자는 10살의 나이로 피난민 노래 자랑에 참가하여 1위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그때 그만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가 국제시장 앞 동아극장에서 인기 가수 백난아의 공연을 보면서 가수의 꿈을 품게 되는데요.

국제시장에서도 노래를 잘하는 아이였던 이미자는 주위의 소개로 미군 부대 위문 공연 무대에 올라 몇 개월간 영어 가사로 번안한 ‘아리랑’을 부르기도 하다가, 휴전 후 서울 계동으로 올라온 뒤 부친이 재혼을 해 다섯 명의 이복 동생이 생기게 됩니다.

이미 6학년 나이가 된 그녀는 종로 YMCA자리에 선교단체가 천막을 치고 운영하던 학교를 다니다가 마포 문성여중고에 진학하게 되는데요.

여고 시절에는 국전에 정물화를 출품했고, 규율부 단장을 맡아 시가 행진을 벌였을 정도로 이미자는 활달했던 학생이었는데, 당시 송민도, 나애심의 노래와 슬픈 영화들을 특히 좋아했던 그녀는 “학교 생활은 재미있었지만, 졸업해 가수가 되는 것만 생각했다”라고 합니다.

 

당시

각종 노래대회에 몰래 참가해 상품으로 큰 그릇과 대야, 양푼들을 받던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 말에 kbs 라디오 노래 자랑 프로인 ‘노래의 꽃다발’에 참가하기 위해 남산에 있던 KBS에 교복을 입고 갔다가 학생은 출전이 불가하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자 다음 날 새 엄마 옷으로 갈아입고 출전을 하는 대담성을 보이게 되는데요.

당시 그녀는 나애심의 ‘밤의 탱고’를 불렀는데 역시 어김없이 1등을 차지했고, 당시 심사를 맡았던 가요 평론가 황문평 씨는 “중학생처럼 어리게 생긴 소녀가 어찌나 노래를 잘 하는지, 심사위원들이 다들 전유를 느꼈다”라고 증언했습니다.

여고 졸업을 앞두고 KBS보다 5년 먼저 개국한 최초의 민영 tv 방송이었던 HLKZ의 ‘예능 로터리’에도 출전해 최고상을 받은 그녀는 입상을 계기로 화신 백화점 카바레의 전속 가수로 픽업됐고, 이후 가수 남일해가 찾아와 kbs 악단장인 작곡가 나화랑과의 만남을 주선하게 되는데요.

나화랑은 그녀에게 데뷔곡인 ‘열아홉 순정’을 선사하여 정식 가수의 길을 걷도록 했지만, 데뷔 초만 해도 이미자는 출연료가 싼 무명 가수였기 때문에 서울보다는 지방 무대를 더 많이 돌아다니며 갖은 고생을 하게 됩니다.

선배들 양말을 빨았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했으며, 한 번은 집안 공연을 갔을 때 여관방이 너무 추워 몰래 도망을 친 적도 있었는데요.

춥고 외로웠던 이 시기에 그녀는 콘트라 베이스 주자인 정진흡 씨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됩니다.

 

당시

스카라 극장 건너편 국제 다방이나 신카나리아가 운영하던 모나미다방은 무명 가수들의 집합소였고, 이미자도 이곳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몇몇 레코드 회사를 기웃거리는 싸구려 가수였는데요.

그녀의 애절한 노래를 귀담아두었던 작곡가 배영호의 추천으로 이미자는 당시 지구레코드사와 계약하여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영화인 ‘동백 아가씨’의 수록곡을 취입할 기회를 가지게 됩니다.

원래 그 노래는 인기 가수였던 최숙자가 부르기로 했지만, 미도파레코드에서 독립해

 

 

모나미다방 뒤에 문을 연 지구레코드는 보따리 장수 수준의 신생 회사였기 때문에, 최숙자 대신 값싼 개런티로 이미자와 전속 계약을 맺었던 것인데요.

목욕탕 건물 2층에 위치했고 선풍기 한 대가 전부였던 지구레코드 녹음실에서 찌는 듯한 여름에 이미자는 임신 8개월 만삭의 무거운 몸으로 찜통 더위와 싸워가며 녹음을 마치게 됩니다.

이후 지구레코드는 인기 배우 최무룡의 ‘단둘이 가봤으면’을 타이틀곡으로 하는 ‘동백 아가씨’ 영화 수록곡 음반을 발매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동백아가씨’ 영화가 온나라를 울음바다로 몰아넣으며 흥행에 성공하자 상황은 급변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타이틀곡은 뒷전이고 뒷면에 수록된 이미자의 노래 ‘동백 아가씨’만 연신 방송에서 흘러나오게 된 것이었습니다.

 

음반을

사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전국의 음반 업자들이 음반을 구하기 위해 아우성을 치자, 언론들은 ‘가요계의 판도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라고 흥분했는데요.

당시에는 음반을 24시간 만들어도 몇백 장 못 만들던 시기였다보니 레코드점에서 ‘동백 아가씨’ 음반을 구매하려면 다른 음반도 같이 사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만 장의 음반이 팔려나간 ‘동백 아가씨’는 35주 동안이나 인기 차트 1위를 점령하는 진기록을 세웠고, 그렇게 무명 가수 이미자는 일약 신데렐라로 떠오르게 되는데요.

‘동백 아가씨’는 미8군 출신 가수들이 주축을 이루던 가요계를 트로트 붐으로 급선회 시켜 트로트 시대에 문을 열게 하며 훗날 가요사적 의미에서도 중요한 노래로 기록이 되게 됩니다.

게다가 ‘동백 아가씨’에 이어 이미자가 부르는 노래마다 크게 히트를 치자 당시 유명했던 20여 명의 작곡가가 이미자만을 위한 노래를 만들기 위해 지구레코드로 모여들게 되는데요.

오아시스레코드에서 훨씬 좋은 대우를 받고 있던 천재 작곡가 박춘석도 이미자를 위해 이적을 자청했는데, 이때 ‘섬마을 선생님’, ‘그리움은 가슴마다’, ‘흑산도 아가씨’, ‘기러기 아빠’ 등의 명곡이 순전히 이미자를 위해 만들어지게 됩니다.

 

그렇게

그녀는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지만, 너무 큰 인기로 살인적인 스케줄에 시달리게 되는데요.

 

 

통행 금지 때문에 밤 공연이 끝나면 야간 열차를 타고 덜덜 떨며, 서울로 올라와도 쉬지도 못하고 곧바로 녹음실로 가야 했는데, 그 이유는 영화는 다 만들었지만 주제가를 녹음 못해 쩔쩔 매는 영화 제작자와 감독이 이미자만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자는 당시 시간이 없어 작곡가가 피아노 반주로 들려주는 노래를 한 번 따라 불러본 다음 바로 음반을 취입했을 정도였는데요.

하지만, 그렇게 최고의 가수로 전성기를 맞이한 이미자에게 갑자기 큰 시련이 닥치게 됩니다.

바로 ‘동백 아가씨’가 외색이라는 이유로 방송이 금지되더니 얼마 후 공연과 앨범 제작까지 금지가 되고 만 것이었습니다.

당시 이 사건을 두고 평론가들은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주체성 확립 차원에서 본보기로 규제한 시대적 희생물이라고 주장했지만, 훗날 이미자는 그것이 아닌 다른 이유가 숨겨져 있다고 밝혔는데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동백 아가씨’를 무척 좋아해 청와대에서 만찬이 있을 때마다 이미자를 불러 이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이미자는 ‘동백 아가씨’가 정말 외색이어서 정부가 금지했다면 금지를 당한 노래를 대통령이 부르게 했을 리 없다고 반박했습니다.

 

그녀는

연속되는 빅히트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던 타 음반사가 극에 달한 ‘반일 감정’에 편승해 심의실과 결탁한 뒤 여론 몰이를 통한 ‘마녀 사냥’에 나선 것이라고 주장했는데요.

게다가 ‘동백아가씨’와 함께 3대 히트곡으로 불리던 ‘섬마을 선생님’과 ‘기러기 아빠’도 각각 일본곡 표절 ‘퇴폐 저속’이라는 이유로 잇따라 금지곡이 되었는데, 이미자는 ‘섬마을 선생님’에 대해서도 다른 주장을 폈습니다.

작곡가 박춘석이 일본으로 가 확인한 결과 ‘섬마을 선생님’과 일본의 국민 가수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곡 중 세 소절이 유사한 것을 발견했지만, 이소라 히바리의 노래가 ‘섬마을 선생님’보다 늦게 나왔기 때문에, 표절 시비를 하려면 미소라가 표절했다고 해야 한다고 항변했는데요.

또한 ‘기러기 아빠’의 경우에도 나온 지 1년 남짓해서 금지됐는데 노래가 너무 비탄조라서 나라의 건설에 저해가 된다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금지곡이 되자 이미자는 자신의 3대 히트곡이라고 할 수 있는 곡들이 나오기만 하면 바로 금지를 당하니까 자신의 생명을 잘라놓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끼며, 도대체 자신이 노래를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 어떻게 해야 되나 하며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가수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를 못 부르게 하는 것은 사형 선고나 마찬가지였는데, 그 노래 외에도 히트곡은 많고 10년 연속으로 10대 가수상도 받았지만,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를 못 부르게 하니까 너무 억울하고 답답했다는 이미자.

 

그 노래들은

이후 20년이나 지나 이미자의 전성기가 한참 지나서야 금지가 풀리게 되는데요.

그토록 숱한 히트곡을 내고, 앨범이 수백만 장이 팔리고 여전히 노래방에서 불려도 이미자는 음반으로는 돈을 못 벌었다고 합니다.

예전엔 인세란 개념이 없어서 앨범이 잘 팔려도 전속사인 지구레코드사가 부자가 됐고, 인세 개념이 정립된 80년대 이후엔 빅히트 앨범을 내지 못했는데요.

또 노래방에서 불리는 노래 역시 작사가와 작곡가에게 저작권이 있어 이미자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동백 아가씨’ 활동 중에 베트남전 위문 공연에 가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지프차를 탔는데 자신만 승용차를 탔다가 군용 철판 도로를 달리는데 승용차 앞좌석이 낮다보니 바퀴가 걸려서 차체가 들리게 되었고, 이후 승용차가 땅에 푹 가라앉으며 앞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혀 이마에서 피가 철철 흐르게 됩니다.

당시 이미자는 공연은 해야 하는데 다쳐서 피를 흘리고 있으니까 다들 걱정을 많이 했고, 군인들이 자신이 누워 있는 곳에 계속 들어오며 상태를 살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무대 인사라도 해야겠다고 억지로 무대에 올랐지만, 결국 혼절해 ‘여기서 죽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요.

 

하지만

이것은 약과였는데, 또한 그녀는 국내에서 경기도 금촌극장 공연을 하고 돌아오다가 북악스카이웨이에서 자신의 차가 영업용 택시와 충돌했는데, 당시 머리와 팔 다리에 심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인생의 죽을 고비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고로 중상을 입고 서울 효자동 강모 의원에 입원한 이미자는 치료를 받고 다행히 얼굴과 어깨의 상처는 나았지만, 오른팔이 붙지 않아 깁스를 한 채 퇴원했는데요.

당시 병원장이었던 목돈상 원장은 ‘이미자가 무대에 서려면 무려 7주 이후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게다가 이 사고가 났을 당시는 이미자가 남편의 폭력에 못 견디고 이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기도 했는데요.

결혼 후 딸 정재은 양을 낳은 이미자는 불과 결혼 4년 만에 남편과 결별하게 되는데, 이후 남편은 삼류 악단장으로 전락하다가 딸에게 막대한 빚을 남기고 일본으로 도망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도망치기 전 남편은 삶이 너무 궁핍해서 딸과 지방을 전전하며 비닐하우스에서 잠을 자기까지 했는데요.

이를 보다 못한 외할아버지는 손녀가 6살쯤 되었을 때 몰래 이미자에게 데려갔고, 그렇게 3년 만에 모녀가 극적으로 상봉을 하게 됩니다.

이미자는 딸을 만나 자신과 살 것인지 물었지만, 딸은 “엄마는 너무 많은 것을 가졌고, 아빠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으니 아빠와 함께 살겠다”라고 답해서 모녀는 사흘 만에 다시 헤어지게 되었는데요.

 

안타깝게도

이미자가 인생에서 딸과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바로 그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딸 정재은은 이후 어머니를 닮아 가수가 되어 활동했지만, 아버지가 큰 빚을 지고 몰래 일본으로 도망가버리는 일이 생기게 되는데요.

오갈 데가 없을 정도로 힘든 현실에 직면한 그녀는 조금은 충동적으로 24살의 나이에 한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결혼식을 앞둔 많은 사람들이 부모 생각이 간절해지듯, 정재은도 결혼식을 앞두고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는데요.

그래서 용기를 내 처음으로 장문의 편지를 써서 어머니 이미자에게 보냈지만, 끝내 이미자는 딸의 결혼식에 나타나지 않았고, 정재은은 그렇게 강남 태극당 예식장에서 라디오 진행자로 활약을 하던 다섯 살 연상 한신우와 부모님 없는 쓸쓸한 결혼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 정재은도 6개월이라는 짧은 결혼 생활을 끝으로 이혼을 하게 되는데요.

그런데 그녀를 더욱더 충격에 빠지게 했던 건 이혼 후 얼마 안 있어 공항에서 마주친 어머니와의 일이었습니다.

정재은은 외국 공연을 가던 중 김포공항에서 이미자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이미자는 “잘 살지 그랬니, 사람들 눈이 있으니 어서 가거라”라는 말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고 하는데요.

 

이후

모녀는 스포츠센터에서 또 우연히 마주쳤지만 이후로는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는데, 이미자는 자서전에서 딸에 대해 회고하기를 “나의 삶에 다른 사람들의 이해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비정하다고 해도 내게는 그게 현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어긋난 길, 우리는 계속 길을 갈 것이다. 그게 나의 운명이고, 또 그 아이의 운명이다”라고 밝혀 많은 이들로부터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딸도 어머니인 이미자의 그런 마음을 이해한다고 밝혔는데요.

이미자의 이런 부분에 대해 혹자들은 딸에게 비정하다는 의견도 있지만, 사실 서두에서 말한 대로 이미자는 고작 네 살 때 어머니로부터 버려지는 아픔을 겪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있어서 사람이 이혼을 하면 부부의 관계를 완전히 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사이에 낳은 자식은 외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한 이미자는 후에 KBS 피디였던 김창수와 재혼했는데 역시 이혼남이었던 김창수에게는 원래 양육하던 두 딸이 있었던 데다가 재혼 후 아들도 하나 더 낳았기 때문에 이렇게 완전히 새로운 가정을 꾸린 이상,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발생했던 모든 상황들은 깨끗이 정리를 하는 것이 이미자로서는 새로운 가족들에 대해 예의를 지키는 길이기도 했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흥미로운 사실은 이미자도 과거 강릉에 공연을 갔을 때 친어머니를 22년 만에 만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인데요.

 

가수가

되어 결혼했지만, 금방 이혼했고 어머니로부터 외면당한 것까지 이미자와 정재은은 기구한 운명도 많이 닮은 것 같습니다.

또한 이미자는 재혼 후에도 엄격한 시부모님에게 눈물 겨운 시집살이도 해야 했는데요.

그녀는 밖에서는 화려한 스타였지만, 집에서는 보수적인 며느리이자 새 엄마와 친엄마 노릇을 다 하느라 몸과 마음이 편한 날이 드물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참자 참자’를 주문처럼 외우며 견뎌내야 했습니다.

게다가 종가라 대소사도 많고 제사도 지내는데, 바쁜 가수 생활을 하다가 전혀 살림을 모르고 종손 집 안에 들어오니 이미자는 너무 힘들었다고 하는데요.

제사가 있으면 집안 사람들이 40명 이상 모이고 부침개만 두세 광주리씩 붙이고 제사 음식을 만들어 상을 차려야 하는데, 그런 일들을 이미자는 해보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정을 얼마나 잘 꾸려갈 수 있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도 있었지만, ‘무엇이든 어려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없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해서 한 가정을 이뤄야 한다’라는 다짐을 많이 했다고 하는데요.

 

자신이

초혼에 실패하고 나니까 ‘가정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인생의 낙오자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자신은 집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없는데 밖에서 집 안으로 들어오면 나는 더 이상 가수가 아닌 주부라고 생각하며 쭉 살아왔다고 합니다.

그녀는 친지 밭에서 콩을 사다가 된장, 고추장 간장을 담그고 봄엔 1년 동안 쓸 마늘을 사서 빻아 냉동실에 넣어두고, 가을이면 고추 사다 햇볕에 말리는 것이 일상이라고 하는데요.

요리할 때 사용하는 모든 양념을 직접 만들고 준비하기 때문에 대스타답지 않게 달걀 한 판, 무한 개값도 척척 말할 수 있고 공연을 앞두면 가족에게 방해되는 것이 싫어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는데 무대에서는 화려한 의상을 입지만 집에서는 매일 추리닝을 입고 일하며 논다고 합니다.

그런 이미자는 데뷔 30주년을 맞이했을 때 기념 공연을 가지기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대관 신청을 하기도 했었는데요.

하지만,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대중가수가 공연하면 고무신 신은 질 낮은 사람들이 관객으로 온다는 이유로 거절을 하며 이미자에게 또 한 번 큰 좌절감을 안기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자는 당시 고건 서울시장을 찾아가 30주년 공연을 하고 싶은데 좀 배려해달라고 간청을 하게 되는데, 생각 외로 시장님으로부터 긍정적으로 추진해보겠다는 답변을 받았고, 결국 이미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게다가

당시 공연에는 4당의 총재들이 모두 부부 동반으로 관람을 와서 큰 화제가 되었는데, 그렇게 이미자로 인해 세종문화회관은 이후 대중 가수들에게 닫혀 있었던 문호를 개방하며, 조용필, 나훈아, 전영록 등의 대중가요 공연이 줄지어 열리게 되었으니, 이미자가 한국 가요계에 끼친 영향력과 공헌도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을 텐데요.

전성기 시절 무수한 이미자의 히트곡을 만들었던 작곡가 박춘석이 별세하며, 고인의 명복을 빌었던 어느덧 팔순이 넘은 이미자의 황혼에 앞으로는 아픔 없이 행복한 일들만 가득하기를 기원하며, 너무나 힘든 인생을 이겨내며 살아온 이미자에게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