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요한 사건 직후,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히딩크 감독은 생애 처음으로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월드컵에 출전한다.
이 기간 동안 히딩크 감독이 맡은 팀은 우연히 그의 고국인 네덜란드였다.
우연히도 차범근 감독이 지도하는 한국이 같은 조에 속하게 됐다.
그는 무자비한 정확성으로 우리나라에 엄청난 타격을 가해 5-0의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일찍 일어나 텔레비전 앞에서 환호했던 사람들은 깊은 실망에 빠졌습니다.

히딩크는 자신의 팀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를 압도하기 위해 심리적 전술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경기가 시작되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당초 일정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한국전 전 경기장에서 연습을 하고, 한국은 오후 7시에 연습할 예정이었다.
7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딩크 감독과 네덜란드 대표팀은 경기장을 떠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한국 대표팀 관계자들은 FIFA와 분쟁을 벌였고, 히딩크 감독과도 논의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네덜란드 팀은 경기장을 비우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는 나중에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해외 경험이 많지 않았던 한국팀은 외국만 나가면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 매고 기가 죽은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점을 미리 알고 있던 히딩크는 경기 전날부터 훈련 시간을 이용해 기선제압을 했던 것이죠.
실제로 당시의 히딩크 모습을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엄하고 굳은 표정이 무서운 인상이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결국 기를 펴지 못한 한국팀은 5 대 0이라는 대패를 맞이했고, 결국 16강의 꿈도 좌절되었죠.
그렇게 월드컵 데뷔마저 성공적으로 치른 히딩크는 이듬해에 세계 최고의 명문 프로팀 중 하나인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취임까지 하는데요.
망했습니다.

석연치 않은 성적으로 7달 만에 경질을 당한 것이었죠.
이후 하위권에 있던 다른 팀의 감독직을 맡기도 했지만, 여기서의 성적도 처참했고 연다른 실패로 인해 2천년쯤 히딩크는 서서히 퇴물 취급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히딩크가 이런 취급을 받지 않았더라면, 한국 국가대표를 맡을 일도 2002년에 월드컵 신화를 썼을 일도 없었을 거라는 점입니다.
한국축구협회에서 히딩크를 감독으로 데려오기로 결심했을 때, 설득했던 말이 “한국대표팀 말고는 당신이 갈 곳은 더 이상은 없다” 는 말이었던 것이죠.

당시 히딩크는 ‘야인’으로 차츰 잊혀져 가던 중이었고, 축구협회 관계자는 이를 파고들어 정곡을 찔렀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감이 없었어도 히딩크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 대표팀을 맡는다는 것은 절대 쉬운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하필이면 한국이 월드컵 개최국이기 때문인데, 당시까지 월드컵 역사상 개최국이 16강을 못 가는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당시까지의 한국은 16강은 커녕 역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초약체 팀이었죠.
이런 팀을 맡아 석연치 않은 성적을 거뒀다가는 안 그래도 관짝에 들어가 있는 그의 커리어는 대목까지 박혀 땅속 깊숙히 묻히는 게 확실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히딩크는 이에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웁니다.
첫째, 강팀과 친선 경기를 하기 위한 파격적인 예산 확대
둘째, 내가 원할 때는 리그 도중이라도 언제든 선수들을 국가대표 훈련으로 부를 수 있게 해줄 것.
훗날 히딩크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그가 내세운 조건은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워낙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을 당할 거라 예상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축구협회는 단 10일 만에 이 모든 걸 맞춰주겠다며 연락을 해왔고, 이렇게 해서 한국 축구는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을 감독 자리에 앉히는 파격적인 행보를 시작합니다.
히딩크가 한국 선수들을 훈련시키며 가장 놀란 것은 겸손과 예의 바름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입장에선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이 특징이 오히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선 방해 요소라는 걸 그는 금세 깨달았죠.
결정적인 골찬스가 와도 후배는 선배가 어디 있는지를 찾고 패스를 했으며, 1초를 다투는 경기장 안에서의 긴박한 커뮤니케이션도 존댓말을 쓰다 보니 그리 효율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때 있었던 그 유명한 에피소드가 바로 식사 시간 도중 막내였던 이천수 선수를 불러 최고참인 홍명보 선수한테 가서 ‘명보야 밥먹자’라는 반말을 시킨 것이죠.
이 사건을 계기로 선후배 간의 반말을 쓰는 문화가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했고, 이는 당시 20대 초반이었던 이천수, 박지성 등 어린 선수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히딩크가 내세운 계약 조건으로 인해 예산이 대폭 확대된 한국팀은 거액을 내고 프랑스, 잉글랜드, 체코 등 세계 정상급의 팀들과 평가전을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받아본 성적표는 연다른 5대 0 참패.
히딩크는 5대 0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었고, 수많은 유교 보이들도 들고 일어나며 한국적인 문화를 무시하고 선후배 간의 격식을 없앤 결과가 고작 이거냐며 조롱을 쏟아냈습니다.
하지만, 히딩크는 아랑곳 않고 이런 말들로 응수했습니다.
“여론을 수렴하다 보면 철학이 흔들린다.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 가능성은 50%이다. 매일 1%를 올려 100%를 만들 것이다. 우리 한국팀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할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열린 월드컵.
이 시절 대한민국은 모두가 축구 하나로 대동단결이었습니다.
첫 경기인 폴란드전부터 시청률은 75%를 넘었고, 결혼식장, 장례식장 가리지 않고 전 국민이 환호했죠.
히딩크는 그렇게 한 달 만에 ‘국민 영웅’이 되었고,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우후죽순처럼 ‘히딩크 PC방’, ‘히딩크 노래방’, ‘히딩크 모텔’, ‘히딩크 삼계탕’까지 그의 이름을 딴 각종 상점들까지 생기기 시작했죠.
4강이라는 꿈만 같은 성과를 낸 그에게 훗날 기억에 남았던 순간을 묻자 ’16강전을 앞두고 선수들에게 병역 면제 소식을 전해줬을 때’를 꼽았습니다.
히딩크는 16강을 확정짓자 격려차 찾아온 대통령에게 주장이었던 홍명보 선수와 함께 선수단 병역 면제를 시켜달라고 어필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 선수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따는 것 말고는 병역 면제를 받을 길이 없었죠.
며칠 후 히딩크는 선수단 전원이 군 면제가 확정됐다는 소식을 듣게 됐고, 이를 곧바로 선수들에게 전달했습니다.
선수들은 하나같이 서로를 부둥켜 안으며 눈물바다가 됐다고 합니다.
히딩크는 흐뭇한 미소를 띠며 자리를 슬그머니 빠져나왔죠.
히딩크가 한국인들을 감동시킨 건 2002년 월드컵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월드컵인 2006년에도 그는 한국인들에게 잊지 못할 기억을 선사했죠.
당시 히딩크는 호주 대표팀을 맡아 일본과 맞붙게 되었습니다.
일본전을 앞둔 히딩크는 인터뷰에서 ‘한국을 위해서라도 일본을 이기겠다’라고 말하며,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를 잘 아는 듯한 발언을 했죠.
일본 언론들은 이 말을 듣고는 경솔한 발언이라며 히딩크를 매도했고, 호주를 타도하겠다며 이를 갈았습니다.
그러나 히딩크는 이번에도 심리전의 달인답게 더욱 일본을 도발했죠.
일본전을 단 하루 앞둔 중요한 시점에 선수단 전원에게 전격 휴가를 줬던 것입니다.
자신 또한 골프를 치러 가는 모습을 일부러 보여주며 일본쯤은 따로 데뷔를 안 해도 이긴다는 이미지를 폴폴 풍겼죠.
일본 언론들은 또 한 번 뒷목을 잡았고, 심리적인 자극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리고 결전의 다음 날.
기를 쓰며 달려든 일본팀은 선제골을 기록하며 1대 0으로 앞서 나갔습니다.
생각보다 일본의 골문은 단단했고 결국 스코어를 뒤집지 못한 채 경기 종료 10분 전이 되었죠.
결국 히딩크는 공격수 3명 교체라는 초강수를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가 교체한 선수들로만 연달아 3골을 합작하며 단 8분 만에 3대1 역전을 시키는 마법을 보여주었죠.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시나리오인 데다가 일본과 히딩크에 대한 국민 감정까지 어우러져 이 경기는 한국에서 시청률 50%를 기록하며 역대 우리나라 경기가 아닌 월드컵 경기 중 최고 시청률을 찍었죠.
당시에 월드컵 결승전의 시청률이 11%에 불과했으니 한국인들을 대상으로는 오히려 결승전보다도 5배가 넘는 시청률이 나왔던 것입니다.
일본 언론은 ‘호주에게 진 것이 아니라 히딩크에게 졌다’라며 보도를 쏟아냈고, 경기 후에 한국 취재진들이 히딩크에게 축하 인사를 건네자 ‘한국의 명예 시민인 게 무척 자랑스럽다’는 답변까지 해서 한국인들에게는 완벽한 엔딩이 되어주었습니다.
사실 2002년 월드컵 이후 일본 축구협회는 히딩크에게 거액을 제시하며 일본 국가대표를 맡아달라고 요청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때에도 히딩크는 ‘한국 감독을 했던 내가 일본 감독을 할 수 없다’라며 단호박으로 거절했죠.
먼 훗날 히딩크는 네덜란드의 한 방송에 태극기를 들고 출연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배운 것 중 뭐가 제일 좋았냐고 묻자 ‘예절 문화’라고 답했는데요.
“경기장 안에서는 쓸데없는 수직관계를 만들어 선수들 간의 효율적인 플레이를 방해하는 요소였으나 경기장 밖에서는 한국인들의 예절 문화와 선함에 감탄했다”라며 소감을 전했죠.
우리나라에게 영원히 잊지 못할 기억을 안겨준 히딩크는 올해로 어느덧 77세가 되었습니다.
지난 20년간 한국을 꾸준히 방문해 왔는데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올해에도 2002년 레전드 팀을 이끌고 유소년 올스타와 시합을 펼치는 등 각종 행사들에 참석했죠.
명예 한국인 히딩크를 잊지 말아주세요.